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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치 Feb 02. 2024

3년 만에 뗀 <초보운전> 스티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가슴팍에 내 이름이 적힌 명찰을 차고 다녔다. 학교 방침상 명찰을 깜빡하면 혼났기 때문에 아침마다 교복에 명찰이 잘 달려 있나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명찰은 똑같은 교복을 입고, 비슷한 머리를 한 수많은 학생이 각기 누구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초보운전’ 스티커는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말 그대로 초보들이 붙인다. 명찰처럼 강제가 아니기에 붙이는 사람도 있고 안 붙이는 사람도 있다. 스티커를 붙이는 사람들은 내가 초보임을 알리면 서툰 운전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고, 내 운전이 답답한 사람들은 편한 마음으로 나를 앞질러 갈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이면 다른 운전자가 무시하기 때문에 안 붙인다는 의견도 있다.      


나는 무조건 붙인다는 쪽이었다. 그것도 기쁜 마음으로. 무면허 시절에는 면허만 따면 언제든 운전할 거라고 떵떵거렸다. 하지만 면허만 따고 운전대는 잡지 않은 채 입으로만 ‘운전, 운전’ 나불댄 세월이 7년이었다. 이제 그 세월을 청산하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시점이었다. 기꺼이 나의 운전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도로에서 만날 다른 운전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여러분, 잘 부탁드립니다. 부디 저를 어여삐 여겨주시옵고, 이 한 몸 불살라 누가 되지 않게끔 열심히….”     


글자에 움직임을 입힐 수 있다면 손을 싹싹 빌면서 연신 굽실대는 동작을 넣고 싶었다. 하지만 현대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문구와 디자인을 신중히 고르기로 했다. 나의 죄송하고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줄 수 있는 디자인을!    


협박성 문구, 배 째라 태도, 읍소형 등 많은 종류가 있었지만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말은 배제하고 간결한 걸 골랐다. 정직하게 ‘초보운전’ 네 글자만 있는 스티커다. 서체는 굳은 의지가 보이게끔 고딕을 택했다. 차에 붙일 때는 ‘운전’은 떼고 ‘초보’ 두 글자만 붙였다. 어차피 차에 붙이는 초보는 ‘초보운전’을 뜻하는 거지, ‘초보사원’ 이런 걸 나타내지는 않으니까. 최대한 간결해야 운전하면서 곁눈질로 흘긋 봐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뒷유리 와이퍼에 방해되지 않고, 내 시야도 가리지 않을 위치를 정한 뒤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가며 붙였다. 가끔 나처럼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인 차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저 사람은 어떤 스티커를 붙였는지 확인하고, 같이 나란히 달리면서 누구의 운전이 더 매끄러운가 가늠하기도 했다.


"후후, 나보다 더 삐걱대는구먼"

"아니 운전을 저렇게 잘하는데 초보 스티커는 왜 붙인 거야? 초보 물 흐리게"

"이보게, 초보일수록 교통법규를 잘 지켜야지. 깜빡이는 왜 안 켜는 건가?"


다행인지 운이 좋은 건지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였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일은 거의 없다. 있었어도 그걸 눈치챌 정도의 여유가 없어서 못 알아챈 걸 수도 있다. 친구는 초보 시절 뒤차가 하이빔을 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저 차는 왜 대낮에 불을 켜지?’ 생각했다고 한다. 모르는 게 약이었을까. 친구는 뒤차의 하이빔 세례에도 당황하지 않고 제 갈길을 갔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경적이야 여러 번 들었지만 긴장한 탓에 그게 나한테 하는 건지 모르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보행자로 다닐 때 무방비 상태에서 들은 경적은 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아팠다. 반면 차 안에서 듣는 경적은 ‘지금 나한테 한 건가?’ 싶게 조금 작게 들렸다(후에 남편이 일러주어 알았다. 아까 그 ‘빵!’ 너한테 한 거라고). 그 당시 나는 앞만 보고 가기에도 바쁜 인생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운전이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좌우앞뒤를 살펴볼 여력이 생겼다.


명찰처럼 달고 다니던 초보운전 스티커는 운전한 지 3년 뒤에 떼어 냈다. 하남의 신도시에서 경기도 양평으로 이사 온 지 일 년쯤 지난 뒤였다. 아이 어린이집, 동네 마트, 도서관, 근처의 대형 쇼핑몰 등 내가 자주 다니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이곳들은 이제 능숙하게 잘 가기에 적어도 여기를 다닐 때만큼은 초보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차에 붙인 스티커는 뗐지만 만일을 위해 자석으로 된 초보운전 스티커를 하나 샀다. 탈부착이 가능한 이 노란색 스티커는 부적처럼 콘솔 박스에 넣고 다닌다. 처음 가는 장소, 길이 어려워 보이는 곳에 갈 때를 대비해서다.


이반에도 간결한 문구를 택했다.


선배 운전자들은 운전이 조금 익숙해진 지금의 내 무렵이 가장 위험하다고 한다. 초보 티를 벗고 자만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스티커는 뗐어도 여전히 초보의 마음으로 다른 운전자들을 향해 중얼거린다. "아이고, 선생님 죄송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전할 방법은 없지만 내 입은 쉴 새 없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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