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재생되는 사랑의 기억
감독 이명세
출연 강동원, 이연희, 공효진
이 영화는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는다. 아니,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다. 마치 이 영화를 휘감고 단단히 붙들고 놓아주지 않고 있는듯한 정훈희의 노래 '안개'처럼. 이 영화의 영상은 어둡고 스산하며, 푸르스름하다. 이 푸른 안개 속에 갇힌 듯한 남자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남자는 마음 속에 방이 여러 개 있다고 한다. 여자는 마음 속에 방이 하나라서 한 사람을 내보내고 다른 사람을 맞이하지만, 남자는 만난 사람만큼의 방이 있어서 가끔 그 방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헤어진 첫사랑의 여자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고도 한다. 이 영화는 예를 들면 그 중 한 방에 갇힌 남자의 이야기다. 그 방의 주인은 당연히 여자이며, 그 여자는 공교롭게도 첫사랑이다. 이 영화의 제목인 M은 두 사람을 묶어주는 이름이며 그 방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기억의 방 어딘가에 있는 미미라는 방에 갇힌 남자의 마음을 따라 간다. 그래서 이 영화 속의 시간은 하나로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턴테이블에 레코드판을 올려놓듯, 미미라는 여자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한다. 마치 추억을 재생하듯이. 하지만 그는 미미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망각의 강에 발을 담그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소설가다. 문인들은 가난할 것이란 편견을 깨기라도 하려는 듯 늘 양복을 입고 다니며, 소주 대신 하이네켄 맥주를 마시는 남자. 비싼 일식집에서 회를 대접 받는 남자. 그는 인기 소설가이며, 세련된 외모와 글솜씨로 여성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그런 그는 분절된 시간을 살고 있다. 그의 시간은 소설처럼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한다. 그는 과거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리고, 잊었다.
그녀의 기억을. 그리고 뚝뚝 끊어진 기억을 재생해내지 못한다. 그녀와 관련된 모든 기억들을 잊은 것이다.
이 영화에는 푸로작이라는 약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이 약의 이름을 여러 번 비춘다. 그러나 푸로작이라는 약 이름을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이 어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 것이다. 푸로작이라는 약은 일종의 우울증 치료제다. 그러나 이 약은 기면증 환자에게 쓰이기도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길에서 갑자기 쓰러지는 장면이 딱 한 번 나오는데 이는 그가 기면증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푸로작이라는 약에는 부작용이 있는데, 폭식증과 망상증이 있다.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출판사 관계자를 만나 식사를 하다가 구토를 하는 장면도 그가 이 약의 부작용으로 폭식증을 앓거나 항상 술에 취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술을 마시면, 알콜성 치매라고 해서 '필름'이 끊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지만, 그 모습은 그에게조차 생경하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본다.
그런 그를 그녀는 늘 따라다닌다. 그녀가 사랑했던 여자. 첫사랑의 여자의 이름은 미미다. 그녀는 주인공을 만나러 가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다. 그녀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죽게 되면 자신이 죽은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사고 주변과 구천을 맴돈다는 말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를 멀리서 숨어서 바라보기도 하고 몰래 따라 다닌다. 그를 짝사랑했던 소녀 시절 모습 그대로.
그는 새로운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도 늘 똑같은 사람 같다. 그 사람과 헤어진 이후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지만, 그녀의 기억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하지만 그녀를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 없는 남자는 그녀를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그녀를 그리워한다.
꿈 속에 매일 그녀가 나와 그는 잠을 자도 늘 피로하고, 정신이 맑지 않아 작품 활동에 전념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가 정말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이 남자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 잊고 말았던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레테의 강을 건너는 중이다. 잊고 싶어하는 남자와 그를 기억 속에 붙들어 매두려는 여자. 남자는 여자의 기억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녀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의 곁을 떠나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야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한 사람을 만나 깊이 알아가는 과정은 한 권의 책을 읽는 것과도 비슷하다.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누군가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어떤 일들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에 변화를 주기도 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써 나가는 것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한 사람을 만나 헤어지면 하나의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소설가다. 소설가라는 직업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직업이다. 자신이 만든 이야기로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이 작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 영화 속의 주인공에게 첫사랑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상대였고, 영감을 주는 뮤즈였다. 그런 여자를 자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것이다. 예고도 없이 느닷없이 사라진 여자. 그러나 마음은 그대로여서 남자는 힘들어하고 그녀를 미워하다가, 잊어버렸다. 그려면서도 그녀가 돌아와줄 것이라 기대하며 기다리지만, 그녀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추억할 수 없다면 살아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던 남자의 말처럼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예전에 내게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 추억하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그 추억이 있어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추억할 수 있는 사람.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추억할 수 있는 사랑 하나를 간직하고 떠날 수 있어 행복하다고 깨달았기에 그녀는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승을 떠날 수 있었다. 남자 역시 그녀에 대한 마음을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기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로 인해 아플 수 있다면, 불면의 밤을 경험해볼 수 있다면, 그것도 크나큰 축복이라는 듯 남자는 웃는다. 그리고 추억한다. 그리고 또 새로운 추억을 써내려간다. 그런 것이다. 고통스러운 현실도 먼훗날 뒤돌아볼 추억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인간은 또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추억할 수 있어 행복하고, 추억이 되기에 조금은 덜 고통스러운 현재의 시간을, '추억'은 만들어준다.
그러고보면 추억에도 어떤 힘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지탱하게 만드는 힘.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누군가의 말은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지금 당신은 어떤 추억을 만들고 있는가? 나는 어떤 추억을 당신과 만들고 있나?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든 두 가지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오래도록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난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먼훗날 웃으며 뒤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