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썩은 사과라고 생각했던 아이의 이야기
감독 융 헤넨, 로랑 브왈로
피부색깔 = 꿀색이라는 영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해외 입양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카뮈의 '이방인'과 델핀 쿨랭의 '웰컴 삼바'를 읽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 속의 주인공 역시 '이방인'이기 때문에 세 개의 이야기는 묘하게 통하는 데가 있었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말하는 이방인은 조금 다른 의미지만) 피부색깔 꿀색이라는 제목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벨기에에 입양될 때 인적사항에 기록된 내용 중 일부다. 피부색에 꿀색이라고 적혀서 갔던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한국인으로 어렸을 때 벨기에로 입양되었다. 이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그의 성장기를 담고 있다. 만화가로 영화 감독으로 성공한 이 영화의 감독은 이 영화를 독특하게 촬영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만화로 구성하고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영상을 촬영해 넣었다. 독특한 형식의 영화였다.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나올 때 흐르던 음악과 그 노래의 가사 역시 입양아들이 겪고 있는 정체성 혼란에 관한 내용이라 뭉클했다.
이 영화는 아리랑이 나오면서 시작된다. 한 남자아이가 벨기에인 부부에게 입양된다. 남자아이는 생각한다.
"마을에 십여 명의 한국 입양아들이 도착했어요. 한국 애를 입양하는 걸 행복이라 생각했대요. 새 차 사는 기분이겠지만 손이 훨씬 더 많이 갔죠. 하지만 우리 양부모님은 새 차엔 관심이 없었어요. 애가 넷이나 있는데 왜 날 입양했는지 궁금했어요."
우리나라는 한때 '입양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쓴 적이 있었다. 그만큼 해외로 입양되는 아이들이 많았던 탓이다. 이 영화에 묘사된 내용을 보면 한국인을 입양하는 것이 벨기에에서는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도 있었던 것 같다. 부끄럽고 슬픈 과거를, 그리고 어딘가에서는 이어지고 있을 슬픈 현실을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의 성장기에 빗대 거울처럼 보여준다.
"발레리는 11개월 때 우리 집에 왔어요. 근데 항상 아팠어요. 그래서 부모님 관심을 독차지했죠. 난 한국 입양아들 만나는 것도 싫어했는데 한국 입양아랑 함께 살게 되다니 발레리를 보면 내 모습이 보였고 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었죠."
감독의 양부모님은 한국 여자아이를 한 명 더 입양한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발레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준다. 한국 입양아를 만나는 것을 싫어했던 주인공은 여동생이 생긴 것이 영 마뜩찮다. 그리고 발레리는 결국 죽고 만다.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진 않지만 원인모를 교통사고로 25살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 영화 속에서 이야기된 것을 보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 같다.
여동생과 그는 '입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입양아였던 둘 사이에 '입양'이라는 단어는 금기어였던 것이다. 여동생과 이 영화의 감독이 어린시절 어머니에게 사랑 받기 위해 했던 행동들은 나의 눈시울을 적셨다.
"우린 어릴 때 양엄마의 베개 밑에 사랑 편지를 써서 넣어두곤 했어요. 좀 더 사랑 받으려고요. 엄마는 한 번도 언급한 적 없지만 편지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더군요. 우린 엄마에게 많은 걸 바랬어요. 그런데 난 무엇을 해줄 수 있었을까요? 난 그저 받기만을 바랬던 것 같아요."
그는 입양된 가정에서 비교적 잘 자랐지만, 신체적 학대나 정서적 학대를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는다. 결국 그는 자신을 일본인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방황하다 집을 나가기도 하고 죽음 직전까지 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그저 '사랑받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사랑 받고 싶어 성적표를 고치고, 들켜서 골프채로 매를 맞고, 외로움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그 속으로 도피하기도 한다. 그는 양어머니가 죽다 살아난 자신에게 어떤 고백을 하기 전까지 양어머니가 자신에게 '썩은 사과'라고 말했던 것을 가슴 아프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양어머니의 고백을 듣고, 비로서 그녀를 '어머니'로 받아들인다. 늘 자신의 어머니는 '한국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그리며 살았던 소년이 양어머니를 어머니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도 쉽지 않았다는 게 느껴진다.
그는 종국에는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과, 자신을 받아들여준 양부모와 형제들을 긍정하게 되지만 그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해, 자신을 버린 조국에 대해 쓸쓸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당신들은 지금 행복하냐"고. "나를 잊은 채로, 나와 같은 존재들을 지우고 살고 있느냐"고. "나는 그저 사랑받고 싶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고.
영화 속에서 그가 던지는 질문과 건네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아프게 가슴을 때리는 영화였다.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되는 영화를 본 것 같다.
"융, 엄마 말 들어봐. 엄마가 너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아주 오래전에 첫 애를 낳다가 그만 잃고 말았어. 그래서 난 마음속으로 널 그 애 대신으로 생각했단다. 이 말은 아무한테도 한 적 없어."
내가 가족의 일원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엄마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단 건 몰랐어요. 난 썩은 사과가 아니었던 거예요.
나의 친엄마. 혹시 보게 되면 원망 안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죄책감에 엄마가 더 힘들었을 거예요. 평생 내 걱정하며 살았을 걸 아니까요.
친엄마에 대한 환상을 항상 갖고 살았는데 그림을 통해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고 가상의 사랑을 누렸어요.
하지만 그건 일종의 도피였죠. 허전함을 채우기 위한 저만의 돌파구였고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그래요, 전 고향 방문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됐어요. 상상 속의 엄마를 사랑할순 없어요.
단지 꿈꿀 뿐이죠. 제게 엄마는 한 분 뿐이고
그분은 실제로 존재하며
날 바라보는 눈빛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건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이죠.
엄마, 누가 내 고향을 물으면
여기도 되고 거기도 된다고 하세요.
난 서양인이면서 동양인이기도 하고
유럽인이지만 아시아인이기도 하고
난 백인도 흑인도 아닌 내 피부색은 꿀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