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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Apr 11. 2017

눈 부시게 흰 어떤 것들에 대한 기록

책이 얇아서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읽었다. 하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한강 작가는 '시'도 쓰지만, 이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시에 가깝다. 시의 언어로 쓰여진 소설이랄까. 좀 천천히 읽고 싶었지만 읽다보니 어느새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이 소설은 소설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소설이 아닌 느낌이다. 시인이기도 한 작가 한강이어서, 한강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흰 것들의 목록을 작가는 작성했다고 했다. 그리고 흰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흰'이라는 제목의 소설에 담았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책 소개 글에서 읽었다.

어떻게 하셨어요, 그 아이를?
스무 살 무렵 어느 밤 아버지에게
처음 물었을 때, 아직 쉰이 되지 않았던 그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겹겹이 흰 천으로 싸서 산에 가서 묻었지.
혼자서요?
그랬지, 혼자서.

아기의 배내옷이 수의가 되었다. 강보가 관이 되었다. 아버지가 주무시러 들어간 뒤 나는 물을 마시려다 말고 딱딱하게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폈다. 명치를 누르며 숨을 들이마셨다. [수의]

삶과 죽음은 한 색깔인가? 그런 생각을 이 문장을 읽고 했었다. 생각해보니 같은 색이었다. 세상에 나올 때는 흰색 강보에 떠날땐 흰 수의를 몸에 감싼 채. 누구나 삶을 앓다가, 또 잃는다는 생각.

위의 문장을 읽고 이 책이 그런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사실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소설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이 책을 읽기 전 했던 생각이 다 읽고 난 지금 생각과 그리 다르진 않은듯 하다. 순환하는 삶과 죽음. 본디 삶과 죽음은 한 덩어리...누군가가 떠난 자리에서 태어난 여자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달떡 같은 아이를 그녀의 어머니는 잃었고, 그녀는 그 달떡 같은 아이가 있었던 자리에서 생겨나 자랐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으로 넘어왔다.

이 책을 읽으며 흰 것들의 속성에 대해 생각했다.

흰 것은 드러낸다.

여기서 드러냄은 조용한 드러냄이다.
흰 것은 완전무결할까?

그러나 쉽게 얼룩이 생기기도 하고
얼룩이 생겼을 때 작은 얼룩이더라도 그것이 더욱 크게 도드라져 보이는 특성이 있다.

또 하얀 것들 속에서는 눈에 띄지 않지만 다른 것들 사이에서 흰색이 유독 도드라져 보일 때가 있다면 그건 장례식장에서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에서 본 한 장면이 생각났다. 그녀의 드라마 속에서 여주인공이 유산을 했다.


그러자 시누이가 말했다. "칠칠치 못하게 아이를 흘렸다"고. 흘렸다는 표현이...어쩐지 마음에 남았다. 삶을 흘린 것은 어쩌면 아이 자신일지도 모를 일. 어떤 아이는 뱃속에서 탯줄로 목을 감는다. 그렇게 자살하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어쩌면 아이들은 자신이 태어날 자리인지 생각해보고 세상에 나오는지도 모른다.


붙잡고 있으렴,
아가 꽉 붙잡고 있으렴.

무엇을 붙잡아야할까.
탯줄을,
세상을,
희망을.

붙잡고
달이 차오르면
배가 풍선처럼 부푼다.

자유를 알기에 사람이라는 것처럼 아이는 자신이 있던 세계를 찢고 나온다.

누구나 자궁에 갇혀 있다가
세상에 나온다.

태초의 감금인지도 모른다. 그 열달의 시간은.
하지만 그 속에서 태아는 사람이 된다.
주어지는 자유가 버겁고
세상은 온통 낯설다.

새로운 것 투성이다.

삶으로 흘러들어오지 못하고
삶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누군가는 뱃속에서 죽는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삶으로 건너온다.

달떡 같은 아이가 있던 자리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째서 그 아이는

삶으로 건너오지 못했는지를 생각한다.
언젠가 신문에서 본 작가의 말이

이 소설 위에 겹쳐진다.

내가 건너온 그 무더운 여름을

왜 그 아이는 건너오지 못했는지.

흰색은 공간을 무한히 확장한다. 흰 것들 속에서 흰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숨어서, 엎드려서...삶과 죽음은 한덩어리로 엮여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서로를 모른척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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