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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Aug 22. 2018

박쥐

인간의 양면성과 죄의식에 관한 은유

 이 영화를 보고 온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상현(송강호)이 난민촌 같은 곳에서 행려병자들을 강간하려다 끌려 나가는 장면에서, 자신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 못 된다는 걸 보여주고, 그 자신도 뱀파이어가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행동을 함으로 인해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그 모든 것들을 안고 가려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이다. 이 말을 듣고 나서 박쥐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어 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사실 위와 같은 말을 듣고 나니, 순교자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던 송강호의 말이 이해가 갔다. 죄의식... 죄의식이라는 건 보통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데서 나온다. 송강호가 뱀파이어로서의 삶을 원한 것은 아니었기에 표면적으로만 보면 그가 죄의식을 가질 이유는 없어 보인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작정하고 저지른 일이나 실수에 대해서만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며, 이에 대해서도 자기합리화를 통해 면죄부를 얻으려는 행동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만 보면, 상현의 행동은 신부였던 그가 할 수 있는 죄 씻음의 한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교자? 순교자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했던 송강호의 말에는 아직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자신의 죄의식을 덜기 위해 저지른 행동이었으므로, 이를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며 그 모든 죄를 대신 떠안고 간 예수나 남을 위해 희생한 순교자와 같다고 보는 건 좀 지나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상현은 자신이 비난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스스로 드러내보였고 이를 통해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려 했던 것 뿐이기 때문이다.


1. 내재된 욕망의 폭발


영화 박쥐 스틸컷

사실 이 이야기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가 등장한다는 점만 빼면, 뱀파이어가 된 신부가  친구의 아내와 치명적인 사랑에 빠져 파멸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로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작은 마을에서 존경 받는 신부로 -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던 상현은 해외에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백신개발 연구에 자원하게 된다. 생사의 기로에서 수혈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상현이 돌아오자 사람들은 상현에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 은총 받은 사람, 특별한 치유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환상을 덧씌운다.
 
낮에는 피부의 껍질이 벗겨지고, 흉측한 몰골이 되는 상현은 온몸에 붕대를 감고 다니며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의 손을 붙잡아주거나, 환자의 가족들과 함께 기도해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그가 모를리가 없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깨닫게 되며,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화 박쥐 스틸컷

그러나 그는 신부로 키워졌던 몸. 그래서일까? 뱀파이어로서의 본능은 사람의 피를 빠는 것이지만 그는 이를 어떻게든 견뎌내려고 애를 쓰며 이전의 평화로웠던 삶을 거짓으로라도 지속시키기 위해 혼수상태인 환자의 피를 몰래 빨아먹으며 버틴다.
 
나는 그가 절대적으로 선한 인간이라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차가울 정도로 이성적인 사람이다. 사실 성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성으로 욕망을 컨트롤하며 구도자로서의 길을 걷는다. 그 길은 결코 쉽지 않다. 금지된 것도 많고, 지켜야 할 것들도 많다. 절대 선을 추구해야하지만 인간의 마음 속엔 선과 악이 공존한다. 그래서 성직자의 길을 간다는 것은 험난한 가시밭 길을 걷는 것과도 같으며 애초에 험난할 것을 알면서도 그 고통을 감수하면서 가겠다고 결심한 사람들만이 가는 길이다. 외로울 수 밖에 없고 고립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때론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스스로 외부와 동 떨어진 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기도 한다.
 
상현의 내재된 욕망은, 사실 폭발할 계기가 없었다. 그는 성직자였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되도록 교육 받았으며 그렇게 길러졌고 자랐기 때문이다. 뱀파이어가 된 후, 그는 동창의 부인(태주)을 만나게 된다. 몽유병에 걸린 듯 맨발로 거리를 달리는 그녀 역시 작은 세상 안에 갇힌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세상은 무능력한 남편과 그녀를 수양딸 삼아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 아들에게 시집 보냈다고, 나 같은 시어머니가 또 어디 있느냐고 말하면서 무시하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시어머니(라여사)가 전부이다.
 
그녀는 그 세상에서 나오고 싶어했다. 스스로를 학대하면서, 그 속에 갇힌 자신의 삶을 저주하면서. 매일 밤 맨발로 미친 듯이 달린다. 그 모습이 상현의 눈에 들어온다. 아무도 보지 못한 자신의 외로움을, 발견해준 상현에게 태주는 사랑을 느낀다. 태주로 인해 상현은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던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에 눈 뜨게 된다.


영화 박쥐 스틸컷

2.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욕망을 컨트롤 할 수 있는가?


상현은 신부였기에 어쩌면 그간 욕망을 컨트롤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능력을 타고났다거나 성격적으로 그렇다기보다는 그가 처해진 상황이나 환경이 그러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주어진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하고, 순응하는 수동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태주를 만나면서 그는 그동안 그토록 고통스럽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더 이상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어쩌면 뱀파이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뱀파이어와 신부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사이이며, 반대편에 서 있는 존재이다.


상현은 더 이상 자신이 신부일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욕망을 억누르며 사는 구도자의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이미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쳐야만 하는 뱀파이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상현은 순수하게 욕망만을 추구하기로 한다. 억압되어 있던 상현의 욕망은 태주라는 기폭제를 만나 폭발한다.


3.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받아들여만 한다. 아니, 그는 받아들여만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박쥐 스틸컷

상현은 뱀파이어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뱀파이어가 되어버렸고, 이미 친구의 아내와 정을 통했다. 돌이킬 수 없다. 이미 많이 와버렸기 때문이다. 상현은 자기를 합리화하는 데는 선수다. 상현은 스스로 뱀파이어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도, 낮에는 붕대를 감고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고, 기도하지만 저녁에는 친구의 아내를 탐하며 -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환자의 피를 빨아 마시며 연명한다. 상현이 절대적인 선을 추구하는 이였다면, 그는 진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그동안 억압되어왔던 삶에서 해방되고 싶었을 수도 있고 - 그 굴레에서 놓여나 마음껏 살아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욕망하는 것은 무엇이든 탐하고, 가지면서. 태주는 상현에 비하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여자다. 그녀는 애써 자신의 모습을 꾸미려 들지 않는다. 욕망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얻으려고 노력하며, 마음껏 탐한다.  


어쩌면 상현은 애초부터 신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뱀파이어로서의 삶을 원하지도 않았듯이. 그저 그는 주어진 상황에 충실했을 따름이다. 별 생각없이 그것을 그냥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으니까. 그래서 태주나 상현이나 억압된 욕망을 분출하고자 하는 건 같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나 그것을 취할 때 보이는 행동은 달랐다. 태주는 금세 후회하고(남편을 버리고 상현을 선택한 것에 대해) 상현 역시 태주를 뱀파이어로 만든 것을 후회한다.


4. 욕망의 끝


영화 박쥐 스틸컷

욕망에 너무나도 솔직한 태주를 바라보면서 상현은 괴로워한다. 자신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 박쥐 스틸컷


상현은 그러한 삶에 종지부를 찍어야 겠다고 결심하게 되고, 태주를 끌고 황량한 벌판에서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러한 삶이 그닥 싫지 않았던 태주는, 상현이 달갑지 않다. 어떻게든 피해보려 애를 쓰지만, 피할 도리가 없다. 태주와, 상현은 함께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며 구원을 얻고자 한다.
 
욕망에 충실한 영화 박쥐는, 박쥐가 되어버린 한 성직자의 삶을 통해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성이 마비된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며, 동물일 수밖에 없다. 동물의 삶은 참혹하다. 욕망에 휘둘려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 인간이 아닌 동물이 된 두 남녀의 삶은 끔찍하고 잔인하다. 그래도 어딘가 남아 있을지 모를 인간성을 상현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랬기에 영화의 마지막에 죽음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금은 웃기고, 조금은 잔인하고, 조금은 시적인 이 영화는 대중을 그리 의식하지 않은 듯 하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박찬욱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가 또 한편 만들어졌다. 누군가는 열광하고 누군가는 혀를 찼겠지만 이 영화를 만든 감독만큼은 100% 만족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감독은 그 자신 역시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자기 것을 고집하는 -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가려고 하는 그의 남다른 고집이 있었기에 박찬욱 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5. 그리고......


송강호 노출 씬은 지금도 아쉽게 생각된다. 꼭 성기 노출이 필요했던 것 같진 않다. 노출 장면은 사실 많이 아쉽다. 사실 송강호보다는 김옥빈의 연기가 개인적으로 더 인상적이었다. 김옥빈을 다시 보게 됐다. 신하균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장면은, 송강호가 김옥빈에게 신발을 신겨주는 장면과 - 김옥빈이 신하균의 환영을 보는 장면. 무거운 돌덩이를 안고 나타나는 신하균의 모습은 상현과, 태주의 죄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장면이었다고 생각되어서 개인적으로 그때의 신하균의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라여사로 분한 김해숙의 연기야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암튼 연기자들의 열연이 돋보였던 영화였던 것 같다. 박찬욱 감독의 그 유머감각도 여전하고. 개인적으로는 무척 재미있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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