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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Sep 30. 2018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영화 버닝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에 대해 설명하는 해미의 모습

삶은 질문하는 자의 것이다. 사람은 질문을 통해 성장한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성장하고 싶어하며 앎의 확장을 통해 삶을 살아내려고 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말도 많고 많지만 나는 이 영화를 ‘생존’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어버린 현대 사회에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이해했다.


이 영화에서 해미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해미의 말을 잠시 빌려와 보자.


“너 그거 알아?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부시맨.
부시맨들에게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가 있대. 굶주린 자.
영어로 헝거.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래. 왜 사는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거를 늘 알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그레이트 헝거라고 부른대.”


보통 요즘 젊은이들은 리틀 헝거일 것이다.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 싶지만 생존하기도 버거운 것이 취업난 속의 사회 초년생들의 사회적 위치일 것이기 때문이다.


해미는 리틀 헝거이면서 그레이트 헝거였다. 그녀는 삶의 의미에 굶주려 있다. 그래서 불안하다. 답을 찾지 못한 채 그냥 배가 고픈 사람으로 고픈 배를 채우려는 노동에 붙잡힌 채 삶을 다 쓰게 될까봐 불안한 사람이다. 그런데 현실은 노동을 해야 살 수 있고 그 노동 속에서 삶에 대한 고민과 의미 추구도 있을 것이다.


노동만 있고 고민은 없는, 고민을 할 시간조차 주어지지는 않는 젊은이들의 모습. 그들의 내면의 불안감을 표현한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을 걸까?’라고 하는 질문 말이다.


그런데 그런 고민은 생존의 문제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 또는 물질적인 잣대로 사람을 계급화하고 나누는 사람의 눈에는 하등 쓸모 없는 일쯤으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벤의 눈에 종수와 해미가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벤은 종수에게 심장이 뛰어야 살아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종수는 벤의 눈에 삶에 붙들린 채 하루 하루 살아내는 일에 급급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종수의 표정은 삶을 잃어버린 자를 표현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종일관 멍했다. 그의 표정은 젊음의 생기라고는 없으며 어쩐지 피로해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얼굴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업난 속에서 생존마저 위협 당하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버텨내는 삶. 살아내는 일에 지쳐 있는 얼굴 말이다.


그러나 종수는 물류 창고에서 면접관에게 이름도 아닌 번호로 불리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며 그 대열에서 이탈한다. 그랬기에 그는 벤에게 분노한 것이고 분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잘 요약되어 나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책에 실린 문장을 이곳에 옮겨 보며 글을 마칠까 한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인 생존에 만족할 수 없으며 자신의 삶이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 그런 갈망이 없다면 그것이 곧 노예의 삶이라는 것. (263쪽,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_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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