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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Jan 25. 2021

꿀을 찾는 벌새의 시간

영화 <벌새>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오빠. 날라리인 언니, 춤바람이 난 아빠와 떡방앗간 일에 고된 하루 하루를 살아내느라 버거운 엄마, 학업 스트레스를 동생에게 푸는 오빠에 의해 가정폭력의 희생양으로 살아가면서도 다만 그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아이, 은희.

그런 은희에게는 같은 서예학원을 다니며 비슷하게 오빠에 의해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살고 있는 지숙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이다.

어느날, 시장에 있는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치던 지숙과 은희는 문방구 주인에게 붙잡히게 된다. 그리고 은희는 지숙에 의해 도둑질을 했던 사실이 아버지에게 알려지게 된다.

은희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 변상을 요구하던 문방구 주인은 그냥 경찰서에 넘기라는 이야기를 듣고 혀를 차다 은희와 지숙을 풀어준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은희와 지숙의 사이는 틀어지게 된다. 이 와중에 남자친구 지완까지 다른 여자아이와 바람을 피운다. 은희는 남자친구와 헤어진다. 믿었던 친구와 남자친구의 배신으로 은희의 마음 속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영지가 힘들어하는 은희에게 한 말)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 은희의 곁에 있어준 사람이 서예학원에 새로온 김영지 선생님이었다. 은희는 지숙의 배신과 오빠의 폭력을 견디는 자신의 마음을 김영지 선생님에게 털어놓는다. 김영지 선생님은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에 가기를 기대하고 강요하는 학교 선생님이나 부모님과 달리 은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봐준 유일한 어른이었다. 은희는 만화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김영지 선생님을 만난 첫날 이야기하게 된다.

은희는 침샘에 혹이 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가족들의 일시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은희는 그런 관심이 나쁘지 않은 눈치이지만 가족들은 사는 일에 바빠 병원 입원 수속을 하는 날을 제외하고 은희가 퇴원하는 날까지도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다. 그런 은희를 찾아온 김영지 선생님은 은희에게 그 누구의 폭력도 견디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폭력에 노출된 채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서 무기력하게 다만 하루를 견뎌내는 은희의 일상이 김영지 선생님은 아팠던 것이리라.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은 언제나 귀하다. 내 마음을 읽어주는 이와는 그게 누구라도 벗이 될 수 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준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위로 받고 때론 감동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빠른 날갯짓으로 날아다니며 꽃의 꿀을 먹는 벌새. 행복한 순간은 재빨리 움직여 꽃의 꿀을 찾아야 하는 벌새의 시간처럼 쉽게 오지 않고, 찰나의 한 순간에 그칠지 모른다.


언젠가 나비가 되는 약속과도 같은 시간에 대한 번데기의 이야기 대신 영화는 벌새 이야기를 한다. 반짝 빛이 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꽃의 꿀을 찾는 순간을 기다리는 벌새의 이야기를. 열심히 날아서 꽃의 꿀을 찾으러 다니는 벌새의 이야기를. 꽃의 꿀을 찾기까지 열심히 날갯짓을 하는 벌새처럼 은희는 날갯짓을 한다. 언젠가 꽃의 꿀을 찾을 그 순간을 기다리며 어떤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라 느껴졌다. 10대 소녀의 그 시간을 곁에서 지켜봐주는 한 어른.

외로운 아이였던 은희에게 기꺼이 곁을 내어준 어른 영지. 내 마음을 읽어준 이와 나눈 어떤 시간, 어떤 우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김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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