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않을 권리에 관하여
이 책은 대형 서점에서 구입했다. 찾아봐도 없어서 도서 검색으로 딱 한 권 남아 있던 것을 겨우 찾아내 손에 넣은 책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늦게 읽었던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필경사 바틀비'라는 허먼 멜빌의 소설이 이 단편 소설집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알게 된 것은, 문장 웹진에서 오는 문장 배달 이메일을 통해서였다. 그때 바틀비라는 인물에게 매료됐던 나는 이 소설을 꼭 읽어 봐야 겠다고 생각하게 됐지만, 어느 틈엔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두 번째로 씨네21에 연재되고 있는 진중권의 아이콘을 통해 필경사 바틀비라는 소설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알게 됐고 조금 지나서 나는 이 소설을 구입하게 됐다. (진중권의 아이콘을 읽고 나서 필경사 바틀비를 꼭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 칼럼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그만큼 내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좋은 칼럼이었다.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롭게, 또 재미있게 읽었던 칼럼이기도 해서 아직 그 칼럼을 읽어보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 이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 중에 - 인터넷에서도 읽을 수 있으니 한 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바틀비에 매료된 '엔리께 빌라 마따스'라는 작가는 '바틀비와 바틀비틀'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책 내용을 살펴본 후 이 책도 읽어보고 싶어서 나의 구입 도서 목록에 올려두었다. 그날은 다른 책을 사러 갔던 것이라 이 책을 구입하지 못했다. 아마 지갑에 여윳돈이 좀 있었다면 이 책을 구매했을 것이다. 다음에 서점에 가면 사려고 생각 중이다. 개인적으로 도서는 오프라인 매장에서 사는 것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온라인에서 사면 책 내용을 살펴보고 고를 수 없고 구경하는 재미가 좀 덜하고 배송 상태에 따라 책이 파손되는 경우도 있고 해서.)
이 소설집은 걸작이라고 불리는 미국 단편 소설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단편 소설을 잘 쓰는 작가는 장편 소설도 잘 쓴다고 생각하고 단편을 잘 쓰는 작가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단편 소설 중에 개성 있고,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때문에 좋아하는 작가가 단편 소설집을 내면 꼭 구입해서 읽으려고 하는 편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소설 중 '검은 고양이', '에밀리에게 장미를'은 오래전에 읽었던 단편 소설이지만 다시 읽으니 (어렸을 때 읽은 것이라) 새롭기도 했고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두 편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처음 접하는 단편 소설이었는데, 너새니얼 호손의 젊은 굿맨 브라운과 마크 트웨인의 캘레바레스 군의 명물, 뜀뛰는 개구리,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 그리고 이 단편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 다 좋았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소설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하고 싶지만, 개인적으로 이 단편 소설집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 또 개인적으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대해 감상평을 남겨볼까 한다.
필경사 바틀비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한 변호사가 있다. 이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남자로 자신의 밑에서 자신의 일을 도와줄 필경사로 '바틀비'라는 청년을 고용한다. 바틀비는 처음엔 그가 시키는 대로 엄청난 양의 문서를 필사한다. 착실하게 일하던 바틀비는 그러나 어느날부터 그가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이유는 딱히 없다. 무언가를 시키면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말만 할 뿐이다. 변호사는 답답하다.
그러나 그런 바틀비를 어쩐지 외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바틀비가 하지 않겠다는 일들을 점점 시키지 않게 된다. 그러자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서 그의 업무량은 늘어나게 된다. 필경사를 시켜서 해야 할 일을 그가 직접 하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고민 끝에 바틀비를 해고하기로 결심하지만, 그는 사무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여기에 남아 있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바틀비는 역시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만 대답한다.
얼핏 보면 사회부적응자처럼 보인다. 결국 바틀비는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그곳에서 곡기를 끊고 지내다가 사망한다. 이것이 이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다. (이 소설을 읽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스토리를 따라 읽는 소설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결말까지 밝혔다)
바틀비가 가지고 싶어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하지 않음'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틀비와 같은 인간은 도태되기 딱 좋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일하기를 거부하면서 그가 얻고자 했던 것은 결국 '하지 않는다는 자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싶다'는 소망의 실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바쁘게 움직이고,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읽고 있던 두뇌에 관한 책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접했다. 그 책의 내용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전부터 - 아니, 어떤 행동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는 그 순간이 오기도 전에 뇌에서는 벌써 행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 의지란 결국 없는 것이고, 자유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무언가를 안하는 것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뇌의 관점에서 보자면, 바틀비는 무언가를 하는 것을 끊임없이 거부하는 인간이었으므로, 오히려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는 그 자유를 얻기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 그리고 끝까지 자신이 안 하고 싶은 것들을 안 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함으로 인해 죽고야 만다. 바틀비는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자유란 무엇인지. 자유 의지란 과연 어떤 것인지...생각하게 만드는 인물로 이런 바틀비의 삶은 관성적이고 타성에 젖어 하루 하루를 그저 바쁘게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던져준다. 내게 바틀비라는 인물은 무척 새로운 인물이었다. 처음엔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바틀비가 그토록 찾고자 애쓰는 것이 무엇인지 -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게도 오롯이 전달되어 소설을 다 읽었을 무렵에는 슬퍼졌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하기 위해 살아간다. 바틀비는 그저 그 순간에 머물러 있고 싶어했던 인물이었다. 그저 존재하고 싶어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시간을 응시하는 바틀비. 시곗바늘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그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멈춰버린 바틀비의 삶은 왠지 모르지만 슬프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용기 있게 보이기도 했다. 바틀비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사회부적응자다. 남들은 다 달리고 있는데, 혼자서 안 달리겠다고 우기고 있다. 다 달리니까 나도 달려야 하는 것일까? 바틀비는 그런 문제를 던져준다. 달리지 않는 사람의 최후는 비참하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려가나? 이유도 모른 채 달려간다. 그래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바틀비는 끊임없이 거부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나는 그런 바틀비의 죽음이 그리 비극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끝까지 자신의 의지대로 살다 간 셈이니까. 하지만 그가 느꼈을 소외감은 한 인간으로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그런 마음을, 그런 욕구를 이해받지 못한 그 외로움은 내게 너무나 아프게 다가왔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좋은 소설이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