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몬

by 기록 생활자

예스24에서 '코'라는 작품의 앞부분을 읽고 흥미가 생겨 구입했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선이다. 우화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실려 있는 단편들은 출판사에서 엄선해서 고른 작품일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런만큼 다 좋았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코>, <마죽>, <엄마>, <흙 한덩이>, <지옥변> 이렇게 네 작품이다.

알라딘에서 무료 배포한 전자책에서 읽었던 (세계단편 걸작선이었던가?) <덤불 속>이라는 작품은 다시 읽어도 걸작이었다.



코는 노승이 주인공인 작품으로 내가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를 제공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예스24에서 미리 읽기로 앞부분을 읽어보았던 이 단편 소설 속 노승의 코 이야기가 너무나 새롭고 또 흥미롭게 다가왔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코'라는 주제로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구입하게 되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코가 길어서 고민인 노승으로 그는 자신의 코 때문에 자신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전전긍긍한다. 그러다 코를 삶아 짧게 만들지만 짧아진 코 때문에 더욱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러다 다시 코가 원래 길이로 돌아오는데 오히려 그 모습에 안도한다는 내용이다.

큰스님은 코가 하룻밤 새 다시 원래대로
길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코가 짧아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가분한 기분이 어디선지 모르게
되돌아온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됐으니 다시는 아무도 비웃지
않겠군.' 큰스님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자신에게 속삭였다.
기다란 코를 동틀 녘 가을바람에
흔들거리며. (코, 17~18쪽)

마죽

<마죽>은 마죽을 먹고 싶어 누군가를 따라갔던 남자가 마죽을 실컷 대접 받고 난 후 마죽에 질려 버려 오히려 마죽을 실컷 먹지 못했던 '결핍'을 그리워하는 이야기이다.


색 바랜 스이칸에 사시누키를 입고 주인 없는
삽살개처럼 스자쿠 대로를 어슬렁거리는
가엾고도 고독한 자신. 하지만 동시에
또한, 마죽을 실컷 먹고 싶다는 욕망을
오로지 혼자서 간직하고 있기도 했던,
행복한 자신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마죽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함께,
만면의 땀이 점차 코끝에서부터
말라 가는 것을 느꼈다.
(마죽, 45쪽)

엄마

<엄마>는 돌연사한 아기의 엄마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옆방에서 아기 울음 소리가 들리는 것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다. 자신의 아이가 죽은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엄마를 만나 잠깐 얘기를 나누기도 하는 이 여자는 옆방 아기도 돌연사하자 묘한 기쁨을 느낀다. 자신의 불행 앞에서 자신과 같은 불행을 겪은 사람의 처지를 보며 묘한 위로를 받으며 마음의 병이 낫는 여자의 이야기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죽은 것이 기뻐요. 안됐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기쁘다고요. 기뻐해서는
안 되는 걸까요? 여보.

도시코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 없었던
격렬한 힘이 담겨 있었다. 사내는 와이셔츠
어깨와 조끼를, 이제는 가득 비치기 시작한
눈부신 햇살로 도금하면서 그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앞을 턱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엄마, 89쪽)

흙 한덩이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남편이 일찍 죽고 과부가 된 며느리와 홀시어머니로 홀시어머니는 전답을 일굴 사람이 없자 며느리를 재가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며느리는 이를 거부하고 직접 힘든 농삿일을 척척 해낸다. 집안의 허드렛일은 자연스럽게 홀시어머니의 몫이 된다. 손자를 돌보는 일도 홀시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며느리는 밭일을 하며 주변 사람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지만 안으로는 홀시어머니를 하녀 부리듯 한다.


그러다 병에 걸려 죽고 마는데 며느리가 세상을 떠나자 홀시어머니는 고된 집안일에서 마침내 해방되었다는 해방감과 함께 묘한 기쁨을 느끼지만 이내 좋은 음식도 못 먹고 죽도록 일만 하다 떠난 며느리를 안타까워하며 슬퍼 한다는 이야기이다.


다미의 죽음은 분명 그녀의 신상에 큰 행복을
불러왔다. 그녀는 이제 일을 안 해도 되었다.
잔소리를 들을 걱정도 없었다. 게다가 저금이 3000엔이나 되고 밭도 한 정 석 단이나 되었다.

이제부터는 날마다 손자와 함께 쌀밥을 마음껏 먹을 수도 있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절인 송어를 축으로 사 놓고 먹을 수도 있었다. 스미는 지금까지 평생 동안 이렇게 마음이 편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마음이 편해……?
(흙 한 덩이, 116쪽)

지옥변

예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미친 화가의 이야기이다. 높은 사람의 부탁을 받고 그는 미모가 뛰어난 자신의 딸을 제물로 삼아 지옥변을 완성한 후 자살한다. 높은 사람은 화가의 딸이 자신의 첩이 되라는 권유를 거절하자 일종의 보복 심리로 화가의 미친 부탁을 수락하고 우마차에 그녀를 태워 (일종의 화차(火車)였을 것이다) 불을 지른다. 눈앞에서 딸이 불 타 죽는 꼴을 보는 것은 생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미친 화가는 그 모습에 절규하는 것도 잠시 그 모습을 화폭에 담아 무시무시한 지옥변을 완성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라쇼몬에는 이렇듯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추악한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인간의 추악함,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인간 내면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감정(또는 본성을)을 이토록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작가의 솜씨에 왜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제정되어 권위를 지켜가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독특하기도 했고 새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깊고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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