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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기범 Jun 16. 2019

[D+22] 거실의 풍경

그리고 김정숙 여사의 "남성도 용감하게 육아휴직" 발언에 대한 생각


유벤투스가 호날두를 중심으로 재편됐다면, 우리 집은 아기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결혼하기 전 혼수를 마련할 때 주변에서 흔히 하던 말 중에 하나가 "거실에 놓을 거 비싼 거 사지 마"였음. 어차피 아기가 태어나면 죄다 구석 or 창고행일 것이라는 이유. 그 말에 왠지 반감이 들어서인지 최대한 물건을 치우지 않으려 해 봤는데, 소파는 수유공간으로 재탄생. 거실 테이블은 구석으로 옮겨진 지 오래.


아기가 자는 공간과 노는 공간을 분리해주면 나중에 습관 들이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리 해보려 함. 거실에는 무드등이 많아서 아기가 나오면 눈이 동그래지며 신기한 표정이라 놀이터로 안성맞춤. 0개월 신생아는 빛을 볼 수 있는 정도의 시력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명이 많은 거실이 별천지인 듯. 초점책도 좋아하는데 오래 보다 보면 아무래도 눈이 피곤한 모양.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가로 줄무늬 블라인드도 좋아함)


거실이 육아 공간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아무래도 목욕. 화장실은 리스크(미끄러진다든가 춥다든가)가 있으니 거실에서 목욕을 시키게 됨. 결정적으로 부모들도 TV는 보면서 아기를 키워야 스트레스 덜 받으니까. 초보 엄빠들이여 멘탈 잘 챙깁시다.


*오늘의 육아템: 짱구베개, 발받침, 초점책, 스와들미, 속싸개, 꾸까, 에어컨 등




스웨덴을 국빈 방문한 김정숙 여사가 이른바 '라떼파파'들과 만나 "육아를 흔히 전쟁이라고 하지만, 오늘 함께 한 '라떼파파'들은 그 전쟁이 얼마나 큰 보람인지 잘 아는 것 같다"며 "아빠는 육아에서 엑스트라가 아닌 공동 주연인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고 함.


'남성 육아휴직 권장'을 위한 무난한 일정인데, 여기서 "한국 아빠들도 용감하게 육아휴직 썼으면 좋겠다"는 발언이 괜히 30대 남성들의 심금(?)을 울리는 바람에 비판받는 모양. '누가 쓰기 싫어 안 쓰냐'는 건데, 좀 예민한 반응이다 싶으면서도 다양한 생각이 들었음.


https://www.yna.co.kr/view/AKR20190608053651001?input=1195m


"용감하게 남성도 육아휴직 쓰라"는 표현은 공부하려는 자녀에게 부모가 "공부 안하냐"고 외치는 것과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함.


나중에 따로 쓸 일이 있겠지만 아빠들은 임신-출산-육아에 있어 소외감을 느낄 일이 잦음. 예를 들면 산부인과 병원을 비롯한 대부분 시설의 모유수유실은 엄마들만 들어가는 구조(큰 방이 하나)로 돼 있고 아빠들은 출입을 엄금하는 식. 대부분 육아서적과 안내문에는 엄마의 역할만 설명하고 있고 아빠는 뭘 해야 하는 건지 일언반구도 없는 경우도 많음.  


공동 육아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는 있지만, 정작 이 시장(?)에 들어와 보면 아빠의 의무와 역할은 무엇인지 알려주는 서적이나 정책적 도움은 거의 없음.


"아빠는 술 먹지 말고 운전이나 잘하고 청소 빨래 설거지나 도와주세요" 수준이 대부분인데, 잘 생각해 보면, 아니, 청소 빨래 설거지는 맞벌이 부부면 원래 같이 하는 거지 이게 무슨 육아 정보냐고. 안 그래도 아기가 엄마 냄새만 찾아서 섭섭한데(물론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지만).


물론 이런 양상이 '독박 육아'가 당연시됐던 시절에 생겨난 것이니 누구의 '잘못'은 아님. 그렇지만 공동 육아를 하고 싶은 아빠들 입장에서는 번번이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결국 "아 원래 육아는 엄마가 메인이구나. 공동 육아는 그냥 이상적인 이야기일 뿐. 그렇다면 난 그냥 회사로 튀어야겠어"라는 편견만.


결론적으로 정부가 부모 공동 육아를 정말 강조하고 싶다면 '용감하게 남성 육아휴직 쓰라'는 메시지는 좀 별로라는 생각. 여성 직장인도 육아휴직 1년씩 꽉 채워 쓰기 쉽지 않은 시대에 남성 육아휴직 권장이라는 모토는 당장 대중의 반발만 살뿐.


공부하기 싫은데 꾹 마음 먹고 책상으로 가는 뒤통수에 "공부 좀 해라 ㅉㅉ" 시전하는 부모님처럼 느껴짐. 무엇보다 육아휴직이라는 제도 자체가 공동 육아 이슈 뿐만 아니라 노동환경 이슈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괜히 전선만 확대하는 꼴임. 메시지에 혼선이 올 수밖에.


차라리 임신 출산 단계에서부터 부모의 공동 역할 수행을 강조하는 상징적 입법이나 제도 마련이 더 낫다고 봄. 관련 법에 차별금지 조항(?) 같은 거라도 하나 넣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면 그 법적 제도적 근거를 바탕으로 '육아는 공동으로 하는 게 기본이구나'라는 인식이 확대될 것이고, 그 인식을 실천으로 옮기는 업체나 병원이 뭐 인센티브를 받는다거나.. 그렇게 되겠지.


뭐 그냥 그렇다는 말.  지면이 허락되지 않는 기자는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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