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자기변명이자 합리화
최근 친구의 소개로 한 회사에서 면접을 봤다. 현재 회사에 다닌 지 2년 3개월쯤 되었으니 참 오랜만에 면접이었다. 1차 면접은 어떻게 통과하였으나, 2차 면접에서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나의 발목은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잦은 이직'이었다. 면접장에 들어가자마자 자기소개를 한 후, 가장 먼저 들어야 했던 질문은 "이직을 많이 하셨는데 각 회사에 대한 퇴사와 이직사유를 말해보시겠어요?"였다. 난 현재 첫 취업 후 (인턴제외) 6번째 회사를 다니는 중인데, 아주 짧게 다녔던 2개의 회사를 제외하고 4개 회사에 대한 내용이 이력서에 쓰여있었다. 각 회사에 대한 이직 사유를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면접을 이어갔지만 전체적인 면접 분위기는 그리 밝지 않았던 것 같다. "본인 회사는 사람을 신중하게 뽑는데, 또 금방 나가버리면 어떡하냐, 추천이나 소개로 이직한 적이 많은 것 같은데 귀가 얇아서 그런 건가?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달라" 등등 질문이 화살처럼 날아와 내리 꽂혔다. 내 역량과 인성을 평가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잦은 이직의 꼬리표를 단 사람에 대한 우려가 더 컸던 것 같다.
20대부터 원하는 직무를 찾고, 탄탄한 직장에 들어가서 한 곳에 최소 5년, 10년씩 재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역시나 잦은 이직 경력은 끈기 없는 사람으로 보는 걸까? 합격해도 갈지말지 고민했던 회사였지만, 결과적으로 탈락을 하니 여러 생각들이 스치면서 허탈했다.
홍보 에이전시에서 인하우스 홍보팀으로
졸업 후 2년 반 동안은 홍보업계에서 업무를 해왔다. 한 번은 홍보 대행사에서, 다른 한 번은 인하우스 홍보팀에서였다. 사회초년생 때 나의 대행사 생활을 그야말로 열정 범벅이었다. 제안서를 쓸 때는 주말 출근, 평일에는 새벽 4시에 퇴근하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나의 클라이언트였던 분이 한 회사를 연결시켜주었고 모든 면접 전형을 무사히 통과해 인하우스 홍보팀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이직자의 공식적인 변
대행사에서 주로 공공기관을 홍보했기 때문에 손에 잡히지 않은 막연한 개념, 인식 등을 공공에게 알리는 역할이 주였다. 우연히 대행사에서 배달앱 홍보를 맡게 됐는데, 공공의 인식을 개선하는 활동보다는 마케팅 활동의 일환으로써 일반 기업의 특정 서비스나 브랜드를 홍보하는 역할에 좀 더 재미를 느꼈다. 앱에 새롭게 추가되는 기능들과 서비스, 그리고 기업의 정책들을 시시각각 쉬운 언어로 풀어 보도자료화하고 기자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마침 기회가 왔던 회사도 게임회사였기 때문에 이용자들이 반응할만한 좀 더 생생한 정보들을 가지고 홍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속마음
대행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은 인하우스로 이직하는 것을 생각해봤을 것이다. 대행사에서 일하다 보면 다양한 광고주와 협업을 하면서 나에게 좀 더 잘 맞는 인더스트리,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역할을 파악해가고, 업무의 외연을 넓히며 직접 발로 뛰는 실무를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광고주의 요청을 수행하는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 수도 있기 때문에 업무의 깊이가 없고, 나무만 볼뿐 큰 그림인 숲은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인하우스에 간다고 해도 대행사의 단점은 상쇄된 만큼 또 다른 단점이 눈에 보이겠지만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이직을 감행했다.
직무가 나와 맞지 않다면?
인하우스 홍보팀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다. 홍보라는 직무에 대한 회의감 그리고 게임업계가 주는 불만족스러움 때문이었다. 2년 반 동안 홍보 업무를 하면서 일 자체는 재미가 있었지만 과연 내가 하는 일이 기업이나 브랜드에 얼마만큼의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성과를 측정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은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걸어가는 것과 같았다. 더불어, 게임을 그리 즐기지 않는 나는 (게임을 안 좋아한다기보다는 회사가 주력하는 RPG 게임에 대한 흥미가 없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 내 자리에 왔더라면 이 일을 더 즐기면서 할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며 나는 이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주니어였던 만큼 과장, 차장님한테 많이 배우고 혼도 많이 나면서 쭈구리 상태로 변모해갔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일을 하려면 좋아하지도 않는 게임을 억지로 플레이하면서 익혀야 하고... 고된 시간이었다. 그리고는 이직할 회사도 정해 놓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퇴직을 감행했다. 무서울 것이 없던 20대. 인생에서 일이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인간으로서 좀 더 나와 핏이 맞는 직무와 회사를 찾고 싶었다.
무모한 퇴사자의 공식적인 변
2년 반 동안 홍보담당자로 일을 하면서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하는 것은 좋았다. 사내 여러 담당자들과 협업을 하고 여러 정보/자료를 취합해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이것을 공식화된 자료로서 외부로 발표하는 과정이 말 그대로 '회사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평소 데이터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공부를 하다 보면 업무 성과를 정량적으로 측정하고 개선해나갈 수 없다는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진짜 속마음
남들은 즐기면서 하는 게임을 일 때문에 억지로 한다는 자체가 괴로웠다. 홍보 담당자는 공식적인 소통창구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가 큰 무게를 가진다. 기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면 회사의 불리한 내용이 잘못 보도될 수 있다. 기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이기 때문에 친밀한 사이여야 하지만 직접적으로 펜대를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성적으로 대하기도 해야 한다. 사적인 커뮤니케이션과 공적 커뮤니케이션의 경계를 나누기가 너무 어렵다. 그만큼 선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교묘한 선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미디어가 요구하면 관계 유지를 이유로 광고비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 합리적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관습적이라고 생각했다.
반복적으로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홍보가 내 길이 아니라면 정말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게임 개발자, PM과 협업을 하면서 광고마케팅홍보 다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제품/서비스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품/서비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포지션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숫자를 분석하고 좀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데이터를 다루는 롤을 맡고 싶었다.
어렴풋이 답을 찾은 30대의 시작
인하우스 홍보팀을 퇴사하고, 서른을 목전에 둔 29살이라는 나이에 부단히도 열심히 방황을 하였다. 기존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완전히 다른 인더스트리에 속해 처음 해보는 역할을 맡기도 했고, 단 돈 5백만 원을 들고 싱가폴로 날아가 외노자로 일해보기도 했다. 다양한 경험은 나를 성장시켰다. 한 곳에 머물러 있었으면 얻지 못했을, 얄팍하지만 넓은 범위의 모험을 즐겼다. 마치 달콤한 스프레드가 골고루 펴 발라진 식빵 같은 사람이 되었다. 이런 방황의 결과로 지금은 한 DSP 광고 회사에 재직 중이고, 그동안 다녔던 회사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다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 곳 또한 천년만년 다닐 것은 아니고 더 좋은 기회가 온다면 언제나 옮겨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경력 관리를 위해 어느 정도의 신중함은 필요할 것이다.
내 커리어의 답은 내가 찾는 것
이직을 자주 한 사람을 끈기 없는 사람이라고 낙인찍을 수 있을까? 과거에는 한 직장에 들어가면 평생직장의 개념으로 20~30년간 한 곳에 머물렀다. 지금은 공무원, 공기업 직원이 아닌 이상 한 곳에 수십 년 재직하는 경우가 흔치는 않은 것 같다. 공무원, 공기업도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경우, 퇴사나 이직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진로에 대해 비교적 많은 고민을 하는 사회초년생 때 고민의 결과로써 나만의 확신을 가지고 다니던 회사를 옮기는 일이 어쩌면 일에 대해 욕심이 많고 결단력이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선택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장점과 단점이 있다. 한 회사를 끈덕지게 다녔던 사람도, 철새처럼 옮겨 다녔던 사람도 선택에 걸맞은 이유가 있고 결과적으로 장점을 크게 보느냐, 단점을 크게 보느냐는 평가하는 사람의 선택이다. 그 선택의 이유가 납득할 수 있다면 어떠한 선택이든 응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용주-피고용인의 관계가 연인관계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적성, 급여, 사람 관계 등의 관점에서 비교적 만족할 수 있다면 꽤 오랫동안 한 회사에 머물 수 있다. 하지만 불만족스러운 부분 때문에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면 회사를 박차고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연인 관계에서도 꼭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닌 것처럼 회사 생활에서도 진득이 한 자리에 머무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책임은 본인이 질 것이며,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번도 어려운 이직을 여러 번 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을 증명하는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면서 본인만이 내세울 수 있는 무기 하나쯤은 장착했을 것이다. 잦은 이직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능가할만한 무언가를 무기로 내세운다면 또 한 번의 성공적인 이직이 충분히 가능하리라 본다. 굳이 쪼그라들 필요 없이 나의 능력이 그 회사에 필요하다면 당연히 그 사람은 선택될 수밖에 없다. 회사가 나를 선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나도 회사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종 결정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