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인, 쉬게 해주고 싶으면 집에 좀 보내 주세요. 사실 그렇잖아요. 사부인도 명절에 딸 보니 반가우시죠. 저도 제 딸 보고 싶어요. 딸 오는 시간이면 제 딸도 보내 주셔야죠. 시누이 상까지 다 봐주고 보내시니, 우리 지영이가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사돈, 저도 제 딸 귀해요.”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입니다. 명절날 오후에 시누이네 가족이 와서 다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김지영이 친정엄마로 빙의되어 한 말입니다.
명절증후군이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절로 인하여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학생은 “공부 잘하냐”, 대학생은 “취업 어디로 하냐”, 직장인에게는 “결혼해야지”, 결혼하면 “이제 아기 가져야지”, 아가가 나오면 다시 “공부 잘하냐” 이 반복되는 물음에 지쳐 버립니다. 그것도 한 분이 아니고, 만나는 분마다 물어보시니, 과연 명절날에 대한 스트레스가 클 만합니다. 하지만 육아 중인 엄마, 아빠에게는 이러한 질문과는 비교도 안 되게 두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1~2년 전까지만 해도 명절 ‘객’이었던 우리가 갑자기 명절 ‘주’가 되어 여러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아기라는 옵션을 달고서 말입니다.
오랜 준비 끝에 펜션을 시작한 것은 2015년 5월입니다. 시작하자마자 메르스 사태가 발생해서 6월 한 달은 아예 휴무를 했으며, 7, 8월 여름이 지나자 바로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양평으로 오기 전 우리의 추석은 다른 가정과 똑같았습니다. 명절 전날에 시댁에 가서 음식을 준비하며 하루를 자고, 명절 당일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식사를 한 후 처가로 가서 하루 자고 돌아오는 3일간의 코스였습니다. 현재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여느 가정과 같은 코스일 거라 생각합니다.
주변의 모든 친구들이 저와 같은 코스로 명절을 지내고 있었으며, 당시 명절증후군, 명절이 싫어요, 명절만 되면 부부간의 다툼이 많아져요 등에 대한 고민이 뉴스 기사의 상당수를 차지하였습니다. 반면 뉴스에는 명절을 맞아 새로운 풍속이 생겨 가족이 다 같이 해외로 여행 가기도 한다면서, 여행사마다 명절 특수를 노린다고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주변에는 그런 가정을 찾아보기 힘들어, 그저 먹고살 만한 사람들만의 신풍속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인식 속에 별다른 생각 없이 맞이한 2015년 추석에 아주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2~3주 전부터 명절날 예약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명절을 얼마 안 남겨둔 어느 날은 아예 추석 연휴 예약이 다 차버렸습니다. 원래는 명절 전날 시댁을 가야 해서 펜션 문을 닫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많은 예약이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입니다. 그해 명절은 당연히 양쪽 집에 연락을 드려 못 가게 되었다고 양해를 구하였고, 그렇게 우리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우리 가족끼리 맞는 명절을 맞이했습니다. 아내와 상의하여 명절 연휴에 움직일 수 없으니, 시댁은 연휴 전에 미리 다녀오고, 친정은 명절이 끝나고 가는 거로 하였습니다.
명절에 오신 분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 할아버님과 나눈 대화가 참 기억에 남습니다. 외동아들 내외와 함께 오신 여행이었는데, 아들이 명절에 음식 하지 말고, 여행 가서 바람도 쐬고, 맛있는 것도 사 먹자고 해서 따라나섰다고 하셨습니다. 꽤 오래 아들에 대한 자랑을 하신 후에 “명절에 가족이 같이 여행을 다닌다는 게 남의 일인 줄만 알았어요. 예전 어르신들한테 배운 대로 명절을 보내는 게 당연한 줄 알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상님들한테 죄를 짓는다고 생각했어요. 또 가족들도 다 같이 모여서 전도 부치고, 막걸리도 한잔하는 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방송에서 나오는 거예요. 명절을 다들 싫어한다고요. 그래서 아들이 이번에 여행 가자고 했을 때, ‘조상님들 뭐. 나 도와준 것도 없는데 매번 명절 때마다 차례 지낼 필요 있나. 나중에 산소 다녀오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얼른 따라나선 거예요. 아직 마음이 쓰이기는 하지만 다들 좋아하고, 대화도 많이 할 수 있어서 더 좋네요. 나만 마음먹으면 이렇게 좋은 거였네요. 나이를 먹으면 젊은 사람 얘기도 들을 줄 아는 게 신식이에요”라고 말씀을 마무리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듣는 제 귀가 의심스러웠습니다. 저도 부모님이 하시던 것처럼 명절날의 3일 코스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으며, 미디어에서 명절날 아내 집을 먼저 가는 것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적당히 시대에 순응하고 살면 되는 거지 뭐 그렇게까지 분쟁을 만드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말 없이 시댁에 먼저 가준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입니다. 할아버님의 아들 자랑이 조금 긴 면이 있었지만, 그런 남편, 그런 아들이라면 충분히 자랑할 만했습니다.
요즈음 결혼 적령기의 여성들에게 결혼 선배들이 충고하는 조심해야 할 남자 중 ‘효자’가 있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효도를 아내에게 ‘대리 효도’ 시킨다는 것이 주요 이유입니다. 수많은 사례가 있겠지만, 명절이 대표적 사례가 될 겁니다. 결혼 전의 남자에게 명절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솔직히 고백하건대, 명절 아침 서둘러 차례를 다녀오건, 친한 친척 집에 잠시 다녀오건, 다녀온 후 바로 친구나 여자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게 다입니다. 명절은 회사를 꽤 오랫동안 안 나갈 수 있는 최고의 휴가였습니다. 회사에서 명절이라고 수당도 주고, 며칠 출근도 안 해야 하니 정말 꿀맛 나는 휴식 기간이었습니다. 취업이 안 되거나, 경제적인 사정 등으로 각자의 어려움이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결혼 적령기의 보통의 직장인은 꽤 비슷한 생활을 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결혼 적령기의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 적령기의 남녀 모두에게 명절은 ‘휴가’였는데, 결혼 후 ‘출근보다 더한 근무’가 되어 버렸으니, 다툼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 명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느냐면, 한 해 이혼 신청 건수 약 11만 건 중 2만6,000건 정도가 설과 추석 전후 10일간 접수되고 있다(법원행정처, 2016)는 놀라운 통계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하루 평균으로 보면 전체 평균은 약 300건인데, 명절 전후 10일간은 평균 656건입니다. 평균 건수를 제외하더라도 명절 전후에 하루 356건 정도가 명절을 사유로 이혼 신청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가오는 명절을 기점으로 우리 이웃과 친구는 또다시 힘든 시간을 겪게 될 것입니다.
결혼 선배들이 말하는 피해야 할 결혼 상대인 효자는 정확히 말하면 ‘효자인 척하는 남자’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잘하는 사람이 ‘좋은 배우자’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께 잘하려고 하는 것도 사람에게 잘하려고 하는 것이며, 부모님께 잘하는 배우자가 와이프에게도 잘하는 남편이 된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고, 대립되는 상황이나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효자가 피해야 할 결혼 상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법학을 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안에서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당사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누군가 이득을 본다면 반드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으로, 습관적으로 반대의 당사자를 찾습니다. 시부모님과 아내 모두 사랑하는 사람들이지만, 대립되는 상황(특히 유교사회에서는 더욱더 많이)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참 많은 상황에서 시부모님과 아내가 대립되는 당사자가 됩니다. 쉽게 단순화하면 여기서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대리 효도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사전에 실릴 정도로 보편화된 단어는 아닌가 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대리’는 남을 대신하여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효도’는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를 뜻합니다. 사전적 정의만 보면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를 남을 대신하여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조금 더 일반적으로 해석하여,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와 뉴스 기사 등을 토대로 대략적 정의를 내려 보면 ‘한쪽의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에게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강요하고 바라는 것’ 정도인 것 같습니다. 주로 남성이 와이프에게 대리 효도를 강요하고 있다는 언급이 많아 보입니다. 맘 카페 등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대리 효도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가져와 봤습니다.
“A형 독감 중인데 시댁에서 명절 지내고 있어요. 전 다 부치고 어지러워서 방에 들어왔네요. 그냥 잠은 집에 좀 가서 자고 싶어요. 20분이면 가는데….”
“시어미께서 넘어져 다치셨어요. 남편이 출장 다녀와서는 시어머니 걱정된다고 하더라고요. 1시간 정도 거리라, 지금 바로 가자고 했더니, 자기는 내일 회의 준비할 거 있다고 못 간다고 하더라고요. 내일 저 혼자 가서 돌보고 오라네요. 내가 운전하는 동안 회의 준비하라고, 혼자는 못 간다고 했더니, 인정머리 없다고 하네요.”
“주말마다 시댁에 가요. 일 있어 못 간다고 얘기하면 반찬 가져가라고 하면서 오라고 해요. 남편은 중간 역할도 못 하고, 우리끼리 어디 간다고 말도 못 하고, 효자 놀이하고 있네요. 시할머니에게도 자주 전화하라고 시키고요. 전화벨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려요.”
한편으로는 속칭 해외여행은 아들이 보내 주는 게 아니라 딸이 보내 준다는 말처럼, 남편 입장에서도 아내의 대리 효도를 한다고 반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교 사상이 아직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아내에게 예전의 어머니가 하던 역할을 강요하는 일이 많다는 점에서 봤을 때, 대리 효도 문제는 주로 아내 쪽에서 불합리한 상황이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남편이 해야 할 일을 대리 효도로 미루지 않는 것만으로도, 조부모님과 아내는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하는 가족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일이 생각을 바꾼다고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아내와 조부모님이 대립 관계가 되는 경우가 많다면 남편이 부모님에 대한 자기의 일을 미룬 것은 아닐까 하고 한 번쯤 달리 생각해 보는 것도 가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효자에 대해 더 얘기해 보겠습니다. 커뮤니티 사례들을 쭉 보면 남편이 원래 효자라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결혼하더니 갑자기 효자가 된다거나 자기는 안 하면서 대리 효도를 시키려고 하는 행태에 대해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남자 입장에서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참 잘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런 친구들은 보통 다른 사람에게도 다정하며, 여자친구, 친구, 직장 동료, 식당 가서까지 예의 바른 친구들이 많습니다. 결코 제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짧은 소견이지만, 이런 친구들을 보면 자신들이 타인에게 잘하는 만큼 매사에 당당하며, 예의 바르다고 해서 할 말 못 하는 바보는 아닙니다. 부모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을 잘 섬기는 아들이지만, 자신의 사생활에 깊숙하게 개입하는데도 할 말을 못 하거나 부모님 눈치만 보거나 하지 않습니다. 결혼 상대로 피해야 할 효자는 부모를 잘 섬기는 효자가 아니라 자신은 효도를 안 하면서 대리 효도를 강요하는 ‘불효자’나, 효자인 척하지만 그저 부모님 말씀대로만 움직이는 마마보이에 가까운 ‘가짜 효자’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주변 가정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남편이 착해서 부모님께 무슨 말을 못 한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겉으로는 표현 안 하지만) 착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부모님께 과거에 뭐 크게 잘못한 게 있어서 말을 못 하는 것이거나, 남자가 좀 어색해서 잘 못 하는 것들을 아내가 대신해 주길 기대하거나, 본인이 판단하기에 아내의 말보다는 부모님 말씀이 더 맞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결혼한다고 인사 오는 남자 동생들에게 꼭 이 얘기를 빼놓지 않습니다. “이제 너는 가장이 될 것이고, 너와 아내가 계획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 처음에는 혼란스럽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네가 꾸린 가정이 진정한 너의 가정이 될 것이다. 어렵겠지만 부모님과 몇 번은 부딪쳐서 ‘부모님과 다시 관계 맺기’를 해야 한다. 부모님께 의지하던 모습을 되도록 빨리 벗어 내고, 부모님께도 이제 철부지 아들이 아니라,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남편이자 아내라는 점을 가르쳐 드려야 한다. 부모님도 자기 아들이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점이 낯설어, 아들 가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시더라. 네가 중심이 되어 부모님에게도 가르쳐 드려야 하고, 아내의 마음도 많이 보듬어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하루라도 빨리 부모님 아래 가정이 아닌 내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불효는 아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다”라고 당부해 둡니다. 부모를 잘 섬기지만, 자신이 꾸린 가정과 부모님의 가정을 잘 구분할 줄 아는, ‘진짜 효자’가 만들어가는 모범적인 가정이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구체적으로 명절에 대해 더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명절날 논란이 될 만한 일은 수백 가지지만, 주요한 사안들만 얘기하면 이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사정이 있는데 안 가도 되나, 친정 먼저 가도 되나, 명절 음식을 다 해야 하나, 시댁에서 언제 출발할 것인가 등입니다. 여성이 의사여도, 정치 유망주여도, IT 기업의 핵심 인재여도,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어 몸이 부어 있어도, 남편이 해외 출장 중이어도 등 어떠한 상황이어도 거의 예외 없이 전을 부쳐야 합니다. 저는 명절 얘기만 나오면 말합니다. 정말 ‘그놈의 전’.
명절을 맞아 가족이 다 함께 모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다 같이 펜션이라도 잡아 여행 가고, 맛있는 음식 사 먹는 게 나을 겁니다. 또한 아들 내외를 친정 먼저 다녀오게 하고, 딸 내외가 오는 명절 당일에 다 같이 모이는 게 더 많은 가족이 모이는 방법입니다. 조상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인사드리는 게 목적이라면 옛 어르신들이 중히 여기시던 아들들이 예를 갖추어 산소에 다녀오면 될 일입니다. 꼭 명절일 필요도 없을 겁니다. 또 친정 먼저 다녀와도 상관없을 겁니다.
조선 시대처럼 씨족사회에서 같은 가문끼리 같은 동네에 사는 것도 아니고, 누구네 댁 몇 대손같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회도 아니어서 누군지 알지도 못하며, 심지어 내가 태어날 수 있도록 해주신 분도 아니며, 여기저기 다 떨어져 각자의 생활을 하고 있어 한 번 모이기도 힘든 상황에서, 조선 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적용하려는 것은 아무리 양보해도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지영이 아직 있었네? 갔을까 봐 걱정했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보고, 그러는 게 명절이지. 지영아, 니도 힘들면 들어가서 좀 쉬라.”
위의 대표 사례 중 김지영은 가장 쉬운 것조차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시댁을 안 간 것도 아니고, 친정을 먼저 간 것도 아니며, 음식을 안 한 것도 아닙니다. 명절에 며느리로서 해야 할 일을 모두 하였음에도, 서둘러 친정에 보내지 않고, 계속 붙잡아 두려는 시부모님의 욕심이 화를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뭐 조금 늦게 출발할 수도 있지 그 시간이 얼마나 되냐고 합니다. 사람이 이미 할 만큼 했고, 견딜 만큼 견딘 상황에서, 마지막 한걸음에 감정의 주체가 안 되기 마련입니다. 힘들까 봐 걱정되면 집에 보내 주지, 왜 시댁에서 쉬게 하나요. 가족이 다 같이 있는 시간이 필요하면 애초에 친정 먼저 갔다가 딸네 가족 올 때 같이 오라고 하던지요. 어르신들도 친정 부모님이 기다리시는 걸 모를 리 없습니다. 그 시간에 조금만 더 늦어도 가장 차가 막힌다는 것도요. 선하게 표현해 본다면 조부모님이 아들 내외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앞섰던 거지요.
이미 우리 사회는 유교적 전통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많은 음식을 차려야 하고 자식들 눈치도 봐야 하는 조부모님도 스트레스, 이미 어울리지 않는 전통 때문에 가부장적인 명절을 보내야 하는 아내도 스트레스, 명절의 잘못된 전통을 알면서도 말하기 어려워 여기저기 눈치 보는 남편도 스트레스, 엄마 아빠의 기분이 안 좋아 싸울까 봐 눈치 봐야 하는 아가들도 스트레스받는 게 현실입니다.
저는 부부간에 피하지 않고 한번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편도 오랜 기간 유교적 전통이 익숙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굳이 다르게 행동하는 게 불편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불편합니다. 아내도 알게 모르게 여성이 우선이었던 것을 고쳐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마음이 좋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명절에 관해서는 두 부부가 처음부터 다시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제로는 절대 두 부부의 잘못이 아니며, 서로를 탓하지 않는다는 점이 약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정마다 사정이 다를 겁니다. 종갓집 가문에 대대손손 큰 제사를 지내는 가정에 유교적 전통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반면 경제적 상황도 있고, 양쪽 부모님을 전혀 신경 쓸 수 없는 것도 아닌데, 다음 명절부터는 우리 가족만 해외여행 가자고 하는 것도 무리일 것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명절에 가서 아내가 전 부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며, 꼭 시댁을 먼저 가야 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 가족의 결정에 조부모님의 의사가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결정을 하든 부부가, 한 가정의 엄마, 아빠가 주도적으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인터뷰를 해보니, 남성들 중에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하면 아무 일 없는데 왜 바꾸려고 하느냐, 그냥 조용히 지나가자고 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하던 대로 하는 게 다 옳은 건 아닙니다. 이미 하던 대로 하는 것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가 힘들어하고 있으며, 나아가 가족 모두 스트레스가 심합니다. 앞으로 50년, 100번 이상의 명절을 지내야 합니다. 가족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가장이 아니라, 불합리한 것들은 대화를 통해 바꿔 가면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오래된 가치관도 버릴 줄 아는 것이 진정한 가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르신들과 여행을 갈 수도 있고, 설과 추석을 달리하여 찾아뵐 수도 있으며, 괜찮은 식당에서 다 같이 식사하면서 용돈 드리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다음 명절은 ‘명절증후군’이 아닌 부부의 결정이 중심이 된 ‘연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