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잖아
제주의 날씨는 가끔 예측이 안된다. 특히 올해는 더 심한 듯하다. 일 년 중 가장 날씨가 좋다는 10월을 골랐는데도 이번에 호되게 당하고 간다.
너무나도 맑은 아침 날씨에 햇살도 뜨거워 가볍게 옷을 입고 길을 나섰다. 그러면 안 됐는데.
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두 방울씩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별 것 아니라 생각하고 그냥 좀 걷다 보면 그치겠지라는 마음으로 걸었다. 하지만 빗방울은 점점 굵어졌고 마침내 폭풍우와 같이 매서운 비바람이 내 왼뺨을 휘갈겼다.
뭐 어쩌겠는가. 내세울 건 젊음뿐이고, 당장 가진건 얄상한 지갑과 굵은 두 다리뿐이니 걸어야지.
계속해서 걸었다. 비구름이 닿지 않은 해변가까지 비구름보다 빨리 도착하기 위해 잰걸음으로 걸었다.
결국 나는 비구름보다 먼저 해변에 도착했고, 쓴 커피 한잔과 조용한 음악 한 곡 틀고 모래사장에 앉았다. 해변에는 나밖에 없었고 썩 나쁘지 않았다. 어느덧 비구름도 물러나고 등 뒤에서 해가 비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하다하다 마른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꽤나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맑은 하늘에 이렇게까지 비가 내릴 수 있다니.
제주의 변덕스러움에 감탄했고 자연 앞에서의 인간의 연약함에 탄복했다.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고 나는 말할 수 없는 황홀경에 빠졌다. 세상 그렇게 빛날 수가 없는 태양과 전혀 그칠 기세가 보이지 않는 빗방울, 그리고 너무나 선명하게 뜬 두 가닥의 쌍무지개의 비현실적인 공존은 나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이번 여행에서 딱 한 가지의 추억을 평생 꺼내볼 수 있게 해 준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날의 종달리 해변을 선택할 것이다.
세상을 살며 얼마나 더 당황스러운 일들이 닥쳐오겠는가? 하지만 그것들도 딱 이 정도였으면 좋겠다.
비바람이 몰아치겠지. 잠시 그쳤나 싶게 해가 나타나 희망을 주었다가도, 상상하지 못했던 빗방울이 태양에 비추인 우리 얼굴을 적실 수도 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순 없다. 머무르면 아무도 만날 수 없다. 멈추지 않고, 가야 할 길을 그저 걸어갈 때 분명히 당황스러웠던 사건은 다만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로 기억될 것이다.
때론 당황스러운 일이 닥쳐오더라도, 그것이 당신의 오늘이 아름다운 한 페이지로 기록될 수 있는 이유가 되길 바란다.
Heaven Is 10 Zillion Light Years Away - Stevie Wonder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