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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리닌그라드 Jan 12. 2023

선악과를 먹은 인간

에덴으로 가는 길


  옛날 옛적에, 큰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예쁜 동산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강이 네 줄기나 흐르고, 온갖 아름답고 맛있는 열매가 맺히는 나무가 많았던 곳이었다. 아마 낙원이 있다면 그곳과 같은 모습이렸다.


  이는 에덴동산의 이야기다. 태초의 두 인간, 아담과 하와가 살아가던 아름다운 동산.

  그리고 그 동산 한가운데, 선악과가 있다.



  신은 그들에게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되 단 하나.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해주는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꾐에 넘어간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고 결국 수치를 알게 되어서 신 앞에서 도망쳐 자신들의 모습을 숨겼다.


  많은 사람들은 선악과를 향해 손가락질한다. 왜 아름다운 동산 한가운데에 저런 흉물을 놔두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에덴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가 한 그루가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가?

  동산 중앙에는 한 그루 나무가 더 있었으니 그 나무의 이름은 생명나무였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찬란한 낙원의 한복판에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 두 그루가 함께 서 있다는 것이다.


  낙원의 한복판에 악(惡)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악이 있어야만 낙원이 낙원인 이유가 증명됐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매일 낙원의 한복판으로 올라가서 두 그루의 나무 앞에 섰을 때, 선악과가 아닌 생명나무를 선택함으로 자신들이 낙원에 있을 수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단 한순간, 자신들이 낙원 그 너머에 있는 낙원을 만든 존재. 곧 조물주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신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신의 명령에 반(反)하여 그 옆에 심기어진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낙원의 바깥으로 떠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대가 없이 주어지는 영속의 삶 대신, 비록 죽을지언정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기를 원한 교만한 존재. 모든 것이 선한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삶이 아닌, 선과 악의 혼돈 속에서 늘 고뇌하며 몸부림치다가 죽어야 하는 존재다.

  이는 매우 어리석지만 또한 지극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낙원에서 인간은 완전한 평안을 누렸으나 세상으로 나온 후 인간은 불행을 맞이했다. 노동 없는 소출이 없고, 고통 없는 해산이 없고, 죽음 없는 생명이 없어졌다. 인간은 자신들의 선택에 책임을 지게 됐다.




  그렇기에 인간은 매일, 살아갈 이유를 찾아 헤맨다. 고통 속에서 인간은 의미를 찾길 원한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낙원에 있을 때는 낙원이 삶의 이유 그 자체가 되었지만 교만해진 인간은 더 이상 누군가에 의해 부여된 이유가 아닌 자기만의 이유를 만들기를 원했다.


  빅터 프랭클은 "의미에의 의지(will to meaning)"를 말한다. 인간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그 의지는 모든 의지, 쾌락과 부와 명예를 앞서는 의지라고 그는 말한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가진 이들은 어떠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고,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면 세상 앞에서 무너진다. 낙원을 뛰쳐나온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어쩌면 삶에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에덴을 포기한 자신들의 선택을 증명하려는 인간의 아집일지도 모르겠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독일어 원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 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지만, 한 가지 자유는 빼앗아 갈 수 없다. 바로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빅터 프랭클-


  신은 당신을 너무나도 닮은 인간을 차마 짐승으로 놔두지 못하고, “자유의지”를 주어 인간을 짐승과 구별되게 했다. 사람마다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사유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축해 나가는 “인격체”로 우리를 존중해준 것이다.

  당신께서 가꾼 정원 한복판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에서 언제라도 저 교만한 자녀들이 동산 너머의 위험하고 거친 세상으로 뛰쳐나가는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 강제로 막지 않으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이 결국 금단의 열매에 손을 대 세상으로 나가길 선택했을 때 신은 손수 짐승의 가죽으로 그 자식들의 옷을 해 입혀주었다.


  에덴을 뛰쳐나온 우리는 어떤 삶의 의미를 갖고 사는가. 누군가는 고뇌하길 멈추지 않으며 삶의 이유를 깨닫길 원한다. 누군가는 고뇌를 멈추고 조용한 동산이 아닌 자극적인 세상을 그저 즐기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이 세상을 자기만의 동산으로 만들려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다시 아버지의 정원으로, 에덴으로 돌아가기 위해 살아간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내가 사유한 오늘은 어떤 모습인가? 낙원에서 떠나온 삶은 어떤가? 과연 낙원을 뛰쳐나올만했다고 자부하는가?


  기억하자. 우리의 오늘은 인간으로서 선택한 하루임을. 우리가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찾고 그대의 삶 속에 에덴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David Bowie - Where Are We Now?

https://youtu.be/nWzw3FpP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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