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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리닌그라드 Jul 21. 2022

노을은 사치가 아닌 추억이 될 테니

작은 하루 끝에서


 나는 삼십여 개 되는 한강 다리 중 당산철교를 참 좋아한다. 당산철교는 서울 도심 서쪽에 있어 지날 때면 한강을 가운데 두고 서울 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에는 여의도 넘어 동편까지 탁 트인 풍경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서울 도심에서 가시거리가 이렇게 넓은 곳은 전망대가 아닌 이상 한강 위를 지나는 대교들 말곤 없을 것이다.


 갓 스무 살이 되어 처음 2호선을 탔을 때 이 풍경을 마주했다. 그때는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서울 사람들만 보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며 30초 남짓의 짧은 풍경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것이 하루 이틀 반복되는 일상이 되고, 매일 똑같은 시간 똑같은 열차를 타다 보니 어느새 철교 위 풍경도 지루한 일상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지친 일상 속 고단한 육체 앞에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사치 일 뿐이었다.



 아직도 가끔 보면 몇몇 사람들은 열차가 철교 위로 올라타면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창 밖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역시 많은 사람들은 나처럼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꽤나 각박한 세상에서 무감각해진 어른들은 그냥 살기에도 버거운 삶에 슬픔이나 기쁨은 겨우 한 줌 정도 남아, 젖은 장작 마냥 호로록 불씨가 올랐다 꺼져버린다. 우리는 그저 이 거대한 도시의 배경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하루는 일정이 늦어져 평소에 탈 일이 없는 시간대의 열차를 타게 됐다. 퇴근길에 강남을 벗어나는 열차는 마치 사람을 실어 나르는 거대한 트레일러 같았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이 열차에 적재되어 배달되는 사람들.

 그러다 점점 열차 안이 한산해지고 당산 철교에 열차가 올라갈 즈음이 되자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몸을 감싸듯이 열차 안으로 따듯한 주황빛이 덮쳐 들어왔다. 한강 위로 저물던 노을이 열차 안으로 스며든 것이다. 매번 보던 서울 쪽 창가 풍경이 아닌 반대편 하늘에 칠해진 노을은 매일 똑같던 집에 가는 길을 완연히 다른 세상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눈을 들어 창 밖을 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바쁜 일상에 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어른들이 함께 노을을 바라보는 모습. 그 모습 속에는 많은 감정들이 있었다. 지친 자기 자신을 향한 위로, 도심 속에서 있고 살았던 자연의 색깔을 향한 경탄, 새삼 만나는 노을에서 느끼는 오래전 안식, 나 스스로 나 자신일 수 있었던 시절을 향한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어느 저리 이렇게 커버렸나 싶은 지금의 나까지.

 물론 지극히 내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열차 안 사람들 모두에게 그 날 만큼은 노을이 사치가 아닌 꽤 오랫동안 남을 추억이 됐을 것이다.


 짧은 순간이나마 열차 안 사람들은 서울이란 거대한 도시의 수많은 군중들 속 하나가 아닌 그저 나라는 존재 그 자체로 존재했다.


언제나 곁에 있던 익숙한 것을 새삼 발견할 때 그것들은 우리를 기억해내게 한다. 치이듯 살아온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철교 위에서 마주한 노을처럼.


 우리는 거대한 담론 안에서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바위 덩어리가 아닌, 수를 셀 수 없이 많은 알갱이로 쌓아 올려진 모래성이라는 것을. 누군가가 원하는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정을 대는 순간 무너져 내릴 거대한 모래성.

 하지만 정작 우리는 우리가 이루고 있는 이 거대한 성이 절대 무너지지 않을 바위라 생각하며 흩날리는 모래알들을 위해 눈물 흘려주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초창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인간의 존엄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신이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실 때 이렇게 말했을 거라 한다.

 “이는 자의적으로 또 명예롭게 네가 네 자신의 조형자요, 조각가로서 네가 원하는 대로 형상을 빚어내게 하기 위함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이유는 그 삶을 강물에 떠내려가듯 사는 것이 아닌 자기가 직접 조각해가며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그 모습은 짐승이 될 수도 있고 신의 모습을 닮은 자가 될 수도 있겠지.

 천년에 중세 암흑시대를 뒤로하고 르네상스의 문이 열리던 순간은, 과학과 사상의 발전이 아닌 개인의 소중함과 인간의 존엄성을 깨달았을 때다.






 거대한 사회와 반복되는 일상에 삶이 무뎌진 나는 매일매일 지나치는 소중함을 잊은 채 살고 있었다.

 우리는 충분히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홀대하고 있지 않은가. 충분히 사랑받아 마땅한 그 사람, 그 장소, 그 순간, 그 안에 살아가는 나를.


 무뎌진 감정과 목적지를 잃어버린 여정 속 손을 놓쳐버린 나의 자아는 어디로 갔을까.

 삶을 사는 이유를 찾기 바란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되찾길 바란다. 그것이 인간이 자유의지를 선물 받은 이유고, 거대한 모래성 속에서도 집단의 재료가 아닌 단 하나의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거다.


 어떤 모양이든 당신에게 의미가 되어준 존재들, 소중한 것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해주지 못했지만 상관없다고, 당신이 그 시절의 모습이 아니어도 좋다고,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러나 언제라도 힘이 들거든 주저하지 말고 돌아오라고.

 그날의 노을처럼, 삶의 순간 불현듯 마주칠 우리의 자아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새삼 기억나게 할 것이다. 나라는 인간의 존엄을, 작은 삶의 소중함을.



 이토록 넓은 세상에서 나의 손을 놓치지 말자.

 참 아름답고, 살아 마땅한 나의 인생을 살아가자.

 저 노을은 사치가 아닌 추억이 될 테니.











Ed Sheeran - Afterglow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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