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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리닌그라드 Nov 30. 2022

삶의 의미는 필요한 것인가?

굳이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는 명예를, 누군가는 진정한 사랑을, 누군가는 재물을 얘기하겠지.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순서만 바뀌었지만 느낌이 조금 다르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체 이유가 무엇이관데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 원하지도 않는 삶의 치열함 가운데 그저 '던져진' 것인가. 어째서 태양은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대체 왜 달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쫓아오는 것일까.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해왔다. 플라톤의 이데아, 칸트의 정언명령, 헤겔의 변증법, 벤담의 최대 행복, 카뮈의 반항,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이와  같이 많은 철학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뭘 위해 살아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찰했고 그것은 가히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라고도 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저마다 모두 삶의 의미를 다르게 정리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들, 이데아 믿음 신념 따위의 것들은 인간 개개인마다 제각기 그 무게가 다르고 가치가 다르기에 섣불리 말할 수 없고, 또한 그 '말할 수 없는 것'의 가치는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해답을 찾는다. 삶의 의미는 절대적으로 '부여받은' 것이 아닌, 저마다 '부여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성경 속 가장 지혜로운 자, 솔로몬의 전언인 전도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솔로몬은 왕이 되기 전 신께 단 한 가지를 구했다고 한다. 그것은 지혜였다. 이에 신은 돈이나 강력한 군대도 아닌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크게 기뻐하며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고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으리라" 말했다. 솔로몬의 이스라엘에선 나라에 금이 차고 넘쳤으며 은이 돌멩이와 같았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줄지어 들어오는 레바논의 백향목은 그 행렬의 끝이 안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나라를 이뤘던 누구보다 지혜로웠던 왕의 지혜의 마침표는, 세상의 영속성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의 연약함과 자신의 무지함이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구했던 지혜는 온데간데없고 세상 속에서 재물과 힘만을 쫓아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보면서 말이다.


  자신이 쫓아 왔던 모든 것의 헛됨을 깨달은 솔로몬은 마지막 편지에 이렇게 쓴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솔로몬의 마지막 지혜는 삶의 의미가 창조주께 있다는 다소 의존적인 고백이었다. 하지만 창조주의 의미를 조금 더 넓게 보자면 그것은 아마 신의 속성들인 절대적인 영원성과 절대적인 선, 그리고 절대적인 지혜일 것이다. 이는 결국 개개인이 각자가 삶의 의미로 삼을 수 있을만한 절대적인 가치와 기준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말한 마지막 고백의 순간 그의 지혜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랐고, 솔로몬 지혜의 아이콘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신이 당신의 기특한 어린 아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아녔을까?


보이저 1호가 찍은 지구 ‘창백한 푸른 점’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아마 인간의 교만함이지 않을까.

  1990년 2월 발사된 지 23년이 된 보이저 1호가 해왕성을 지나칠 때 칼 세이건은 지구의 사진을 찍어보자고 했다. 더 이상 멀어지면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촬영된 지구의 사진은 아름답지도 푸르르지도 않았다. 그저 가득한 어둠 위로 밝은 점 하나가 찍혀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칼 세이건은 말했다.

  "저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저 창백하게 질린 점 하나를 보라. 우리는 교만하기엔 너무나도 작은 존재다. 작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존재. 차라리 금수였다면 무의미하다 하여 통곡하지 않으리. 먼지만큼 작은 존재로 태어난 지적이기에 불행한 존재는 오늘도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서 입증시키려는 투쟁을 하고 있다. 결국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신이 되지 못한 짐승의 발버둥이리라.






  그렇다고 우리의 사는 삶이 가치가 없어 무기력하게 살다 사라질 존재인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럴 순 없다.

  사람은 제각기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중 그 누군가라도 이름을 가진채 태어나는 자가 있던가? 스스로 이름을 가진 자가 있던가? 이름은 주어진다. 모든 것은 명명된다.

  만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세상 모든 것들은 뭐라고 부를까. 아니, 굳이 "부른다"는 콜링의 행위를 할 것인가? 사자가 과연 서로를 부르는 이름이 있을 것인가? 어제를 어제라고 하고, 오늘을 오늘이라 하며, 내일을 내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에 이름을 지어주는 아담의 행위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신의 명령이요, 만물의 영장으로서 부여된 교만함이다.

  아무리 작은 점이라 할 지라도 내가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그 자체만으로 존엄한 인간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인간으로서 인간이길 위한 투쟁을 멈춰 선 안된다.

  오늘날 먼지 같은 저 창백한 작은 점 위에 살아가는 교만한 인간들이, 이름 없이 존재하던 온 우주 만물에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는 뜻의 세상(世上)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삶의 고삐를 틀어 쥐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하루의 주권을 내가 가지고 세상이란 거대한 우주의 중심에 나를 놓는 것이다.

  저 작은 점 위에 사는 존재들의 삶이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의미들로 가득하길 바란다.











Billy Joel - Vienna​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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