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칼리닌그라드 May 31. 2022

빛나는 은발찌

구름을 잡겠어


 대통령이 바뀌었다. 새삼 뉴스를 안 본 지가 언제인지 싶어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들어갔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인터넷으로는 절대 뉴스를 안 보겠다 선언한 이유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뉴스는 웬만하면 TV로 접한다. 인터넷 기사는 어쩔 수 없이 수많은 대중의 의견을 마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게 그곳에 흔적을 남기는 분들은 익명성을 무기로 다분히 공격적이고, 존중과 배려보단 비판과 힐난이 주를 이룬다. 나는 그러한 인터넷 풍토를 달갑게 여기지 않기에 뉴스와 시사, 사회 비평은 방송국을 통하여 차분하게 정제된 내용으로 접한다.


 거기서 나는 생각한다.

 과연 저들 중 진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이는 몇 명일까?


신문


 누군가의 의견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견고히 구축하고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대게는 누군가가 주장하는 바를 정론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으로 선택하여 그것을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참 많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생각을 선택하는 것조차도 긴 장고를 거쳐야만 하는 시대를 사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명확하게 가지고 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을 포기한 채 살 수는 없다. 자신의 생각을 포기한 채 선택을 맹신하는 사람들의 공격성은 사회의 긍정적 영향을 끼치기 어렵다. 대부분 하나의 생각만을 가진 사람은 비판을 즐기며 대척점에 선 자들을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세대와 세대가 척을 지고 남자와 여자가 척을 지고 좌우가 척을 진 모습은 이미 우리에게 만연하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에 취해 있기 쉽다.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쉽다. 자기가 선택한 사상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사상이 더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좋다고 느끼는 생각에 취해버린 사람들.

 스스로 생각하는 행위의 무거움을 모르기에 상대의 가치의 무거움도 인지하지 못하여 빠질 수 있는 흔한 교만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바라보는 물자체를 자신의 의지로 사유하는, 의지로서의 표상을 말했다. 세상의 본질인 물자체를 자기가 의지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말한다.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에서 스탈린은 쇼펜하우어의 표상을 전체주의의 도구로 사용한다.

 책에서의 스탈린은 지구에 있는 사람만큼 표상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혼동을 만들기 때문에,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선 강력한 의지로 단 하나만의 표상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커다란 의지의 지배 아래 놓이면 사람들은 결국 아무거나 다 믿게 되는 법이거든”
‘무의미의 축제’ 中


 스탈린이 생각한 정의에 2,300 죽었고, 히틀러의 정의에 1,700 죽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의 표상을 가지고 그들에게 열광했다.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생각한 것이 아닌  하나의 강력한 의지로 부여된 표상을 따른 무지의 소치였다.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 리로이 존스


 노예에 익숙해지면 노예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당하다는 인지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이집트에서의 고된 노예 생활을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광야에서 자유인으로서 책임을 지는 삶이 시작되자 모세에게 욕하며 자신들을 이집트에 다시 돌려다 놓으라고 요구했다. 자유인으로서 광야에서 사는 삶보다 노예로서 살아야 하는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안타까운 원성이다.


 사실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은 발에 묵인 작은 쇠사슬뿐이다. 자신의 조금의 편안함이, 대의와 가치보다 소중해 스스로의 발 목에 묶었던 쇠사슬.


 우리는 지금 어떤 사슬에 묶여있는가.

 정치와 진영의 논리

 자기 소견에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은 거짓됐다는 섣부른 판단

 우리는 지금 어떤 은발찌를 자랑하고 있는가.


 홀로코스트 당시 수용소 안에는 카포라는 존재가 있었다. 수감자였으나 검증을 통해 수감자들을 관리하는 대리인 격을 맡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들과 똑같은 수감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나아가 폭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역사에 남기를 앞잡이라는 뜻을 지닌 카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미국의 승전 후 전범의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이 본 사실 중에는 거대한 시련 속에서 세상에 없을 사랑을 보여준 이들도 있었다. 삶을 포기한 사람들을 독려하고 자신의 빵을 더 어려운 자에게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공통점은 소망이었다. 언젠가 되찾을 자유와 미래를 향한 소망. 매일 밤마다 침상에 누워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던 사람들. 그들은 매일매일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고 또 물어 스스로 답을 찾았고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사유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빛이 없는 땅에 자신들이 스스로 빛이 된 자들로 역사에 남았다.

 조금의 안락함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저버리는 노예들, 스스로의 생각과 가치를 위하여 자신의 편안함을 버릴 줄 알았던 자유인들의 차이다.






 카프카의 소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에는 한 원숭이가 나온다. 원숭이가 우리 안에 갇혀서 하는 일은 앉아서 벼룩을 잡고 사람이 오면 혀끝을 우리 밖으로 내미는 것, 그리고 소리를 죽이고 흐느끼는 것뿐이었다.

 원숭이는 자유가 아닌 출구를 원했다. 그리고 그 출구는 우리에서 벗어나는 문이 아닌 '사람의 말을 연습하는 것'이었다. 우리를 탈출해도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 다녀야 하는 원숭이가 아니라 사람의 말을 함으로 세상을 누비고 다니는 단 하나의 원숭이가 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출구였다.


 노예인 채로 자유를 얻게 된다면 다시 자신을 노예로 써달라며 주인을 찾아갈 것이다.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선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말을 하며, 자신의 생각을 하며, 자신의 행동을 하는 것.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들은 하늘의 구름과 밤하늘의 별을 보면 그것들을 잡으려 손을 뻗는다. 하늘의 떠가는 구름을 잡겠다고 폴짝폴짝 뛰며 말도 안 되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그 눈에는 호기심이 있다. 궁금해하며 의문을 품고 질문하며 그것에 답을 찾겠다고 구름을 잡는 것처럼 방방 뛰어다닌다.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필요하다.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고 답을 찾아서, 구름을 잡기 위해서 뛰어다닐   하늘에 구름이 내려와 우리를 만나줄 것이다. 우리가 다가가는 것이 아닌 해답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카포가 쟁취한 조금의 안락함보다 카프카의 원숭이가 쟁취한 완전한 자유를 원한.


 구름을 잡겠다고 뛰노는 어린아이가 되자.












Chet Baker - I Get Along Without You Very Well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맑은 밤하늘 (에필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