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양귀비는 아편성분이 없는 개양귀비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쓰러진 전우들을 기리는 꽃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모든 전쟁에서 쓰러진 영혼을 기리는 꽃으로 인식되고 있다. 양귀비의 꽃말은 '위안', '쓰러진 병사'.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사자를 추도하는 꽃으로 지정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일인 11월 11일을 영령 기념일(Remembrance Day)로 정하고 양귀비꽃 모양 배지를 옷에 다는 풍습이 있다.
하지만, 전우가 쓰러지기 전에 아예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미 사라진 후에 이루어지는 위로는 씁쓸하다. 어떤 힘든 상황이 닥치기 전에 아프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꽃이 피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식물의 성장체와 맞아떨어지는 경우에 개화가 시작된다. 식물이 개화할 만한 환경 예를 들면, 일조량, 영양, 낮과 밤의 길이가 적절하고 꽃을 피울만한 여건이 되면 마지막 단계에서 플로리겐이 등장하여 밋밋한 줄기 끝에 꽃봉오리를 맺히도록 촉진한다.
플로리겐(florigen)은 식물의 줄기에서 꽃의 발화에 방아쇠를 당기는 개화 촉진 호르몬이다. 플로리겐은 1930년대 러시아 과학자들이 착안한 단어로 플라워의 Flo와 발현하다의 gen을 합쳐서 만들었다.
꽃에게도 사람에게도 호르몬은 너무 중요한 존재이다. 얼마 전에 지인이 신경정신과에 가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상생활이 안될 정도라 하니 안타까웠고 어쩌나, 꼭, 좋은 병원으로 가봐,라는 말 밖에는 다른 대답할 말이 없었다. 되지도 않을 위로나 상황을 낙관해 보는 얕은수는 통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병원에 가면 뭐 해, 약 먹는 거? 정신과 의사들이 처방해 주는 약이라는 게 호르몬이야.’ 지인의 얘기를 들은 다른 지인의 반응은 이렇다. 호르몬이라는 단어가 머릿속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람의 감정을 좌지우지하는 물질은 온몸을 타고 도는 호르몬, 화학물질이다.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은 화가 나는 것과 공포를 느끼는 것, 감정상태를 반영하여 기민하게 움직인다. 신경과에서 처방해 주는 약들도 근본적으로는 호르몬이다.
맞다. 호르몬은 매우 중요하다. 호르몬은 사람을 좌지 우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반항심에 호르몬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다. ‘호르몬’이라는 단어가 많은 것을 설명하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에 대한 답일지언정, 어떻게에 대한 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온 우주를 감쌀 듯이 아름다운데 꽃을 피우게 하는 화학 물질이 플로리겐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되는 것에는 신비감이 사라지는 듯한 실망감을 갖는다.
사람도. 신경정신과에 다니든지 말든지, 에스트로겐을 처방받는 늙은 여자이던지 말던지. 생명이 호르몬으로 규정되는 것은 뭔가,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짜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