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을 읽지 않아도 다 이해되는 줄거리
허생원은 갖가지 옷감을 취급하는 드팀전 상인으로, 장에서 장으로 행상을 도는 장돌뱅이다. 20년을 넘게 장돌뱅이로 잔뼈가 굵은 데다 나이 지긋한 그를 주변에서는 ‘생원’으로 불러준다.
강원도, 특히 봉평, 대화 등지를 주로 돌고 있다. 본인 입으로 청주 어딘가가 고향이라고 했으나, 내내 한번도 살피러 가지 않은 걸 봐서는 가족 친지 하나 없는 혈혈단신인 것 같다. 그런 그에게 있어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사시사철 펼쳐지는 풍경들, 저녁 무렵 불빛이 어른어른하는 장터 마을의 정경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가슴 설레게 하는 고향 그 자체였다.
이런 그가 이제껏 장년에 이르기까지 결혼 한번 하지 않은 채 홀로 늙어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왼손잡이에다 얼굴에 곰보자국 가득한 얼금뱅이라는 핸디캡과 콤플렉스 때문이다. 당시 왼손잡이는 어딘가 모자란 장애인 취급받던 때였다. 게다가 원체 숫기까지 없어 놓으니, 여자 앞에만 서면 얼굴만 붉히고 말 한마디 못했다. 물론 여자 쪽에서 먼저 다가오는 경우도 없었고 말이다.
그나마 젊을 때는 돈 푼 꽤나 모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백중(百中, 음력 7월 15일에 열리는 농민 축제)이 열리던 어느 해, 젊은 혈기에 읍내 투전판에서 시원하게 다 날려 먹었다. 돈 다 날리고 빚까지 지게 되었으나 함께 다니던 정든 나귀만은 끝끝내 넘기지 않았다. 이후 빚에 허덕이며 겨우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처지로 나귀와 함께 내내 장돌뱅이를 하고 있는 터다. 결국 반평생 가까이 함께 늙어가고 있는 나귀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피붙이자 분신이었다.
그런 허생원이 장을 돌 때 절대로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봉평’이다. 아마도 그가 종종 이야기하는 젊었을 적 단 한 번의 꿈같은 ‘그 일’ 때문인 것 같다.
‘그 일’이 있던 밤은 보름달이 휘황하게 떠 있었다. 눈이 닿는 곳은 새하얀 메밀꽃 천지였다. 달빛이 메밀꽃을 비추니 온 세상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 눈부신 하얀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게다가 한 밤을 지난 때라 세상은 너무도 고요했다. 달이 살아 있다면 숨소리조차 들릴 것 같은 그런 밤이었다.
허생원의 말을 빌리자면 그날따라 묵고 있던 객주집 토방(土房)이 너무 더워 홀로 개울가로 목욕하러 나갔단다. 그런데 주위가 너무 밝아 그대로 옷을 벗기가 민망해 방앗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난데없이 성 서방네 딸을 만났다. 봉평서 제일가는 미인으로 소문난 처녀였는데, 집안이 어려운 처지에 있어 홀로 방앗간에 앉아 근심하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서로 놀랐으나 특별한 밤 분위기 탓인지 서로 걱정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두 남녀는 마음이 통해 정을 나누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해도 무섭도록 기이하고 신비로운 인연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처녀는 바로 제천으로 도망쳐버렸다. 아마 한 순간 분위기에 휩쓸려 큰일을 저질렀다는 자책과 후에 있을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번 장 날 허생원이 다시 봉평에 와 보니 성 서방네는 아예 마을을 떠나버린 상황이었다. 그리고 장터에는 성 서방네 처녀가 외간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집안도 기운 데다 안 좋은 소문까지 나버렸으니 그대로 눌러앉아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연민과 걱정에 마음이 아팠던 허생원은 성 서방네 처녀를 찾기 위해 제천 장터를 몇 번이고 뒤지고 다녔으나 끝내 소식한 줄 얻어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로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 된 그 처녀를 잊지 못해 봉평에 다니기를 반평생 해왔다는 것이다.
한여름 장은 서늘한 새벽에 열리고 더위가 정점에 달할 정오쯤이면 파장이다. 그날도 허생원은 같은 드팀전 상인이자 친구인 조선달과 봉평 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정오가 되어 슬슬 휘장을 거두고 장사를 접으려 할 때, 조선달은 대화 장으로 가기 전 한 잔 걸치자며 충주댁이 하고 있는 술집으로 잡아끌었다. 허생원이 충주댁에 관심이 있다는 걸 진즉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요즘 충주댁이 젊은 행상인 동이와 만난다는 소문도 들려주었다. 반신반의하던 허생원이었지만, 술집에 들어서 막상 동이와 충주댁이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는 걸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홧김에 욕을 퍼부으며 따귀까지 한 대 갈겨 버렸다. 동이가 일어서 덤벼들려고 하는데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지금 행실이 부모님께 걱정이나 끼치는 불효라는 꾸중 아닌 꾸중까지 해댔다. 그러자 어찌 된 일인지 동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비실비실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조선달, 충주댁과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지만 허생원은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나간 동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나이도 많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충주댁을 놓고 시샘을 부린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때 동이가 헐레벌떡 달려와 허생원 나귀가 줄을 끊고 난리를 피우고 있다고 알렸다. 반가움과 고마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장판을 뒤져 나귀를 찾아 달래 흥분을 가라앉혔다. 장터 아이들 장난이라고 생각해 혼내려고 했으나 사실은 다른 암컷 당나귀를 보고 흥분해 발광을 한 것이었다. 아이들은 늙은 나귀가 암컷 때문에 저 혼자 흥분한 것을 가지고 놀려댔다. 허생원은 마치 조금 전 충주댁을 놓고 동이를 시샘했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발끈 화를 내었다. 마침 쫓아온 조선달과 동이가 만류했고 함께 짐을 싸서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 셋은 함께 대화를 향해 길을 떠났다. 달은 휘영청 밝은데 주위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마침 만개한 메밀꽃이 달빛을 받아 흰 빛 천지였다. 허생원이 그 옛날 성 서방네 처녀를 만났던 밤과 꼭 같은 밤이었다. 회상에 젖은 허생원은 언제나처럼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그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선달은 한두 번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길이 좁아 한 줄로 늘어선 탓에 맨 뒤의 동이에게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산길을 벗어나 다시 큰길로 나오자 셋은 나란히 섰다. 허생원이 먼저 동이에게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사과했다. 동이는 허생원의 꾸중 덕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며 오히려 고마워했다. 그리고 제천에서 미혼으로 아이를 낳고 집에서도 쫓겨나 홀로 자신을 키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 어머니는 새 남편을 얻어 술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부는 술주정뱅이에 돈만 탕진하는 놈팡이였고 툭하면 동이와 어머니에게 손찌검까지 했다. 결국 의부와 의절하고 열여덟이 되던 해에 집을 나와 장돌뱅이를 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고 했다. 마침 개울을 건너고 있었는데 물살이 꽤 세었다. 그런데 동이 어머니의 고향이 봉평이라는 말에 허생원은 혹시 옛날 ‘그 처녀’ 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흔들린 탓에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버렸다. 허우적거리던 것을 얼른 동이가 달려와 구해 주었다. 동이의 등에 업혀가는 동안 뼈에 사무치는 듯한 따듯함마저 느꼈다. 어머니가 지금 제천에서 홀로 살고 있고, 동이의 생부와도 한 번쯤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자 허생원은 알 수 없는 기대와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고 대화 장을 돈 후 동이와 함께 제천으로 가기로 작정했다. 밤 길을 재촉해 가고 있는 허생원의 눈에 동이의 왼손잡이가 새삼스레 눈에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