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14. 유수연
“누나, 있잖아”
진기가 신이 난 말투로 레고의 닌자고 시리즈 부품을 조립하며 말했다.
“응?”
“세복이 누나, 내 친구들한테 인기 폭발이야. 내가 내 친구들한테 세복이 누나가 남자고 누나 애인이라고 말해 놨거든. 다들 잘 속아주고 있어.”
저절로 세복이에게 눈길이 갔다. 세복이는 웃음을 참으며 진기가 작업대로 쓰는 앉은뱅이 밥상 앞에 앉아 무척 느긋하게 닌자고 시리즈에 나오는 콜의 어썰트 바이크인지 뭔지 하는 것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러면, 영민이는?”
“영민이 형도 누나 남자친구라고 말해 두긴 했는데. 세복이 누나만큼은 인기가 없어. 잘생기긴 했는데 뭔가 평범하대.”
그 대목에서는 나도 웃음이 나왔다. 사실이었다. 꽤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선량한 인상과 그야말로 아무런 특징이 없는 옷차림 덕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발에 채이면 걸리는 돌부리마냥 흔한 부류의 청년에 불과했다. 더구나 진기와 같은 초등학생들의 눈에는 오죽했겠는가. 박영민이 마냥 평범한 동네 삼촌으로 보이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선해 보이는 눈매가 그의 본성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많지 않은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누나.”
“응.”
“여자끼리는 애인 못 하는 거지?”
말문이 막혔다. 딱히 곤혹스럽지는 않았지만,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세복이가 입을 열었다.
“너, 정말 내가 네 누나 애인이었으면 좋겠어? 네 친구들 말고, 네 생각을 묻는 거야.”
“당연하지!”
“아, 그래?”
여전히 세복이의 입가에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그 미소가 나를 얼마나 설레게 하는지 본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그런 미소였다.
“평범하지만 잘생긴 영민이는 어때? 네 누나랑 나이도 같고, 남자고, 애인도 없고. 둘이 붙여놓으면 그림도 잘 나오는데.”
“그게.”
진기가 고개를 절레절래 저었다.
“그렇긴 한데. 영민이 형도 좋긴 한데. 우리 누나한테는 별로야. 역시.”
그 기회를 틈타 나도 한 마디 했다.
“나도 영민이는 별로야. 그래서, 그냥 세복이 애인 하려고. 여자면 어때? 네 친구들만 모르면 되는 거지 뭐.”
사실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 줄 문제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 영민이가 이런저런 군것질거리와 새로 산 보드게임을 들고 현관으로 들어섰고 우리의 대화는 거기에서 막히고 말았다.
이대로 모든 게 흘러가 주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눈을 감고 뇌까렸다.
그때 본 그 사람이 강태석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지금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그건 틀림없는 강태석이었다.
오산역에서 그를 목격하고 나서야 그가 포기하지 않고 나를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내게 있어 악몽 그 자체와도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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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윤락가에서 일년 남짓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노래방 도우미였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초저녁부터 꼭두새벽까지 노래를 했다. 학교 다닐 때 영어를 잘했기에 팝송도 곧잘 부르곤 했다. 같이 일했던 언니의 말로는 뒤에서 나를 찾는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2차를 나가거나 몸을 팔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남자도 내게 손을 대지 못했다. 욕정으로 가득 찬 시선을 보내며 침을 삼키던 남자들은 번번이 내 앞에서 허무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뒤돌아서야 했다. 그 이유가 ‘강태석의 여자’로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 자의 철저한 감시 때문에 여느 윤락녀들처럼 몸을 팔지 않아도 되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아이러니다.
그렇다고 순결을 고스란히 보존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이미 오산에서 부산으로 끌려오는 동안 몇 번이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강간을 당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내 처녀막을 터뜨린 사람의 얼굴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약을 탄 음료수를 마시고 강제로 당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부산에서는, 어느 누구도 내게 손을 대지 못했다. 강태석만이 예외였다.
그러나 그 자는 내 몸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 자가 내게 요구했던 것이 단순한 성관계였다면 오히려 참고 견딜 수 있었을까. 아니다. 나는 그 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조차 역겨웠다. 그 자가 내게 요구한 것들은 정상적인 행위를 한참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어느 한 부위도 예외없이, 나는 그 자가 가리키는 곳이면 어디든 그 부위에 내 입을 가져가야 했다. 내가 거부하거나 비위에 못견뎌 구역질을 하면 그 자는 담뱃불로 내 몸을 사정없이 지졌다. 팔이나 다리처럼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부위는 철저하게 피하고, 가슴골이나 겨드랑이 혹은 엉덩이 등, 평소 옷을 입은 상태에서는 거의 알아채지 못할 그런 부위만 골라서 지져댔다.
매일 그런 식이었다면 아마 그 곳에서 미쳐 버렸거나, 혹은 미친 상태로 죽었을 것이다. 거의 한 달에 두 번 아니면 세 번 꼴로 그런 몹쓸 짓을 당하며 나는 일년을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곳에서 도망쳐나왔다. 그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데이트 강간에 흔히 쓰이는 수면제를 빼돌리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그 곳에서 시달리다가 지금쯤은 미쳐서 죽어 구천을 떠돌고 있었을 것이다. 강태석이 가끔 마시는 청량음료에 나는 그 수면제를 탔고, 그의 지갑과 건물 주차장으로 통하는 비밀 출구의 열쇠를 몰래 빼낸 후 내가 갇혀 있던 건물을 도망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