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의 폭주
14. 박영민
나중에 알았지만, 그날 중해방의 조직원들이 합심해 선사한 선물은 함세복과 유수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었다.
결혼식은 아침 일찍, 그러니까 10시 경에 예정되어 있었다. 일찍 세복이가 수연을 납치해 가야만 그날 하루를 온전히 둘만의 시간으로 보낼 수 있으리라는 중해방 조직원들의 자상한 배려였다.
내가 입을 턱시도를 조달해 온 것은 용태였다. 그리고 수연의 드레스는 수연이 보여준 사진을 토대로 정아가 친구에게 부탁해 만들었다고 했다.
신부를 빼앗기는 신랑 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속으로 그게 결국 내 팔자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순간적으로 들었지만 결국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게 진짜로 내 운명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결국 장소는 웨이크 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가짜 결혼식 날 아침,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연을 창고에 숨겨 놓고 턱시도를 입은 채 바에 걸터앉은 나는 머릿속으로 웨딩드레스를 입은 세복이를 상상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의 상상력의 한계를 탓해야 할지, 아니면 도무지 웨딩드레스와는 매치가 되지 않는 녀석의 비주얼을 탓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는데 밖에서 오복이가 도착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담치 형의 경고대로 세복이는 아주 편안한 차림으로 등장했다. 흰 티셔츠에 멜란지 그레이 빛깔의 후드 집업과 낡은 블루진을 걸친 모양새였다. 녀석은 한 손으로 오복이의 키를 손가락에 걸어 빙글빙글 돌리면서 건들거리며 들어왔다.
"오, 그림 좋은데? 결혼 축하해."
나를 본 녀석이 싱글거리며 그렇게 시비를 걸어왔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다음 순간,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유수연을 두 번째로 만난 날 편의점에서 둘이 나눈 대화였다.
-그때 그 여자애. 다시 연락해 볼 생각 없어?
-내가? 왜?
-너하고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 수연이란 아이.
-에이, 내 취향 아니야.
-그러지 말고 연락 좀 해 봐. 혹시 알아? 몇 번 만나다 보면 정들고, 정들다 보면 사귀게 될지.
그런데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수연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조용히 마스크를 벗는 그녀가 수연임을 확인한 순간, 세복이가 나를 쿡쿡 찌르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러나.
무슨 운명의 해괴망칙한 장난인지. 정작 수연에게 빠져든 건 내가 아니라 나에게 그토록이나 그녀를 열심히 권했던 세복이였다. 결코 웃을 수 없는 스토리임에도,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네의 신부는?"
세복이의 수작을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는데, 드디어 저쪽에서 수연이 나타났다.
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나도 오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면사포 없이 짧은 베일만을 머리에 두르고, 발목까지 올라오는 꽤 무난하고 얌전한 스타일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연이 저만치에서 부케를 들고 천천히 걸어왔다.
옅은 신부화장을 한 얼굴이 청초하면서도 화사했다.
어깨가 완전히 파인 옷이 아니라 짧은 소매가 붙어 있긴 했지만, 대신 가슴이 꽤나 깊게 파여 있었다. 목걸이 따위는 걸치지 않아서 뽀얀 상아색 피부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불편한 발목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거의 발목 위를 덮다시피 올라오는 굽이 낮은 흰색 하이탑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분명히 부자연스러워야 할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수연은 무척 아름다웠다. 마치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 인형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복이의 눈빛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