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말보로 리스트 10

# 10 악(惡)과의 동침

by Kalsavina

# 10 악(惡)과의 동침



말보로 리스트를 작성하는 전 과정에서 무엇보다 도움이 된 것이 악의 미모였다고 말한다면, 글쎄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을까? 그러나 사실이었소. 자고로 세간의 남자들에게(심지어는 여자들에게조차도) 고래로 가장 유용했던 수단이 바로 미인계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거요. 모름지기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갈망이 바로 모든 인간들을 유혹할 수 있는 열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동시에 그 갈망 때문에 모든 인간의 발걸음이 악을 향한다고 할 수도 있지. 좌우지간 내 곁에서 끊임없이 그리고 부지런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던 악은 아름다웠고 자신의 미모를 유감없이 자신의 임무 수행에 이용했소. 우리를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가 행하는 괴이하고 왜곡된 자비를 이해하지 못했소만, 악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이해를 보였소. 즉 미녀가 건네주는 한 갑의 담배에 다신의 신상명세를 가르쳐 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소. 때로는 ‘이런 개인 정보를 이용해서 개인 기관에 팔아먹으려고 하거나 사기를 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미심쩍은 질문이 돌아올 때도 있었소. 그때마다 악은 상냥하게 그게 아니라고 대답하며 원하신다면 신상명세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소.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신의 신상명세를 털어놓았소. 그 중의 한 사람이 한 말이 유달리 기억에 남소.

“하긴 사기를 쳐도 있는 놈들에게 사기를 쳐야지. 우리 같은 밑바닥 핫바리들한테 사기 칠 똘아이들 같으면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할 거야.”

사실 그러했소. 세상의 고난에 찌들릴 대로 찌들린 가난뱅이들이 그들의 고달픔을 위로해 주는 한 갑의 담배를 마다할 이유는 절대로 없었소. 게다가 얼마 안 가 돈 때문에 피우지 못하게 될 담배였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담배와 더불어 그들이 결코 가지지 못할 악의 아름다움마저 조금씩 떼어가고 싶은 욕심을 은연중에 드러내듯 악을 오래오래 쳐다보았소. 악의 아름다움은 저 대로변을 오가는 수많은 젊은 계집아이들이 지닌 그런 아름다움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소. 그렇다고 해서 악이 마녀적이라거나 파괴적인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뜻은 물론 아니오. 악은 말하자면 아주 착하고 선하면서도 매력적인, 그리고 섹시한 요정이었고 선녀였소. 나는 머릿속으로 악을 모델로 삼아 찍은 흡연 홍보 포스터를 제작해 보았소. ‘당신의 세금이 담배로 뜯길 때 당신의 인권 역시 뜯겨져 나갑니다’라고 자신있게 또박또박 발음한 후 생긋 웃는 악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아주 현실성이 없는 계획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소.

그러나 그보다도 더 현실성이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소.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라면 혐오감을 느낄 법한 곳을 골라 찾아다녔소. 대체로 빈민가가 주를 이루었지만 간혹 가다 장소를 잘못 골라잡을 때가 있었소.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담배를 필요로 할 젊은 부랑자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높은 장소 말이오. 재래시장, 모텔촌, 홍등가의 뒷골목, 선술집 등등의 장소에서 때때로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과 마주쳤고 마주칠 때마다 항상 놀라곤 했소. 그들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만 모여들어 서식한다는 느낌이 들었지.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묘한 연민을 느꼈소. 나 역시 충분히 그들의 패거리에 끼어들 소지가 다분했던 사람이었으니 말이오. 그들은 대부분 담배만큼이나 탐욕스럽게 그 담배를 나누어주는 악을 탐했소. 노골적인 시선만으로도 알 수 있었지. 때로 담대한 몇몇 사내들이 악의 가슴을 슬쩍 만지거나 악의 허리를 쓸어내리거나 악의 손을 쥐어잡아 보기도 했지만 악은 그러한 희롱 때문에 노여워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소. 그녀는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로 자신의 임무만을 수행할 뿐이었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천금보다도 소중한 휴가를 얻었소. 휴가라고 해 봐야 고작 이틀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황공의 아지트인 저 호텔 밖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붙었지만 저 진절머리나는 말보로 리스트를 작성하는 작업을 멈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감지덕지할 일이었소. 사실 악과 더불어 말보로 리스트를 작성해 가는 동안 내 통장에는 적지 않은 돈이 쌓이고 있었고, 말보로 리스트에 오르는 가난한 애연가들과 극빈자들의 이름은 계속해서 쌓이고 있었소. 줄어드는 것은 담배 뿐이었지만, 그 역시 전혀 줄지 않고 계속해서 공급되고 있었소. 나는 속으로 황공이 담배 공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기도 했소.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의혹이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소. 황공이 흡연자의 권리를 지키고 억울한 세금을 치러야 할 극빈자들의 위안품을 지키겠다는 작중한 사명감 때문에 이 일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잘 아는데 담배 공장을 운영하든 말았든 그걸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단 말이오? 나는 그저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편히 쉴 수 있게 된 것에 고마워하며 내 방에 홀로 벌렁 드러누워 있었소.

그때 노크도 없이 악이 불쑥 들어온 거요. 나는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다음 순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장미꽃 같은 악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소. 그녀는 자신의 방에 들어온 양 자연스럽게 내 침대에 걸터앉았소. 내 허벅다리가 악의 엉덩이에 슬쩍 닿았지만 그건 과히 신선한 자극이 되지는 못했소. 그때까지 내게 있어서 악은 그림의 떡, 이라기보다는 뭐랄까, 그림 속의 여성이나 다름없었다오. 동경의 대상, 자위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 그림 속의 여자와 섹스를 한다는 걸 상상이나 하겠소? 내 허벅다리가 그녀의 몸에 닿았을 때 비로소 나는 그녀가 그림 속의 여자도 아니고 잘 빠진 인형이나 조각이 아닌 실재하는 여자라는 걸 분명히 느낀 거지.

“어쩐 일입니까?”

마침 잠이 소록소록 쏟아지던 터라 방해를 받았다는 묘한 짜증까지 느끼며 나는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물었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뭡니까?”

“여자 경험에 대해서요.”

참으로 미묘한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지 않소? 남자 혼자 누워 있는 방에 불쑥 들어온 여자가 다짜고짜 그 문제에 관한 얘기를 꺼낸다는 건 말이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 당시 내 기분은 그 문제에 관해서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았소. 그래서 짐짓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누워 버린 거요.

“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많아요? 아니면 적나요? 그것만이라도 얘기해 줄 수 없겠어요?”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지.

“딱 두 번 해 봤소. 첫 여자는 친구의 누나였고, 두 번째는 대학 때 사귀던 후배였소. 더는 묻지 마시오. 더 얘기하고 싶어도 그 이상의 경험담은 없으니.”

“그렇군요. 그럼 세 번째 경험을 제의한다면 거절하시겠어요?”

귀가 번쩍 띄었지. 악이 나에게 제의한 것은 나로서는 예상 밖의 일이었소. 우선은 놀라웠고, 그 다음에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황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소. 나는 무의식 중에서도 그녀를 여자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던 거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어렵소. 그녀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그 알 수 없는 적개심과 공포는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소. 황공의 양녀라는 그 지위가 나로서는 왕녀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여겨졌지만 그 또한 악에게 성욕을 품지 못한 완벽한 이유는 못 되오. 난감하게도. 그녀로부터 단도직입적인 제안이 들어온 그 순간에조차 내 물건은 늘어진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오.

“싫으세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소. 나는 오랫동안 내 물건이 일어설 때의 그 느낌을, 여자를 안을 때의 그 느낌을 잊고 있었던 거요. 그래서 이제는 내가 남자임을 다시 기억해내고, 확인해야 한다고 느낀 거지.

악은 조용히 내가 입은 셔츠를 벗겼소. 나 역시 서두르지 않고 악의 느긋하고도 차분한 손길에 내 몸을 맡겼소. 그 이상의 이야기는 미안하지만 생략하기로 하지. 당신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지. 아마 당신의 상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테고. 사실 악과 사랑을 나누던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가슴이 벅차오. 황공의 밑에서 지냈던 시절의 추억 중 유일하게 내 마음을 움직이는 추억이지. 그날의 오르가즘은 완벽하다는 말로는 벅찰 정도였으니까. 나는 쾌락의 절정이 통증의 절정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그날 깨달았소.

그뿐만이 아니오. 악과의 정사는 내게 오르가즘 이상의 의미를 선사했소. 악과 더불어 빠졌던 그 황홀경이 내게 그때까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즉 삶에 대한 분명한 자각을 깨우쳐 준 거요. 즉 ‘나는 분명히 잘못 살고 있었다’는 자각 말이오. 당시 내 나이는 아직 젊었으나, 그때까지도 그러한 황홀경을 누리지 못한 채, 또 그러한 황홀경을 꿈꾸지도 못하고 살아왔다는 건 분명 내 삶을 이끄는 나침반이 고장나 있었음을 의미했소.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악에게 고마움과 미안함, 호의를 느꼈지만 사랑을 느끼지는 못했소. 반대로 부채처럼 베개 위로 펼쳐진 머리카락의 중심에 자리잡아 나를 올려다보던 악의 얼굴에는 호의 이상의 것이 어려 있었음을 나는 기억하오. 그 역시 사랑은 아니었소. 어쩌면 연민이었을지도 모르지. 나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과 말보로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 그리고 어쩌면 세상 그 자체에 대한 연민 말이오. 그녀와의 섹스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 대해서는 묻지 마오. 뜨거웠고 황홀했고 미친 듯이 헐떡거렸고 짐승처럼 소리질렀고 끈끈한 체액으로 온 시트가 축축해졌고......도대체 참신한 표현이라고는 없쟎소. 도대체 나는 질탕한 포르노조차 못 되는 내 귀중한 추억을 소재로 삼아 대하소설을 쓰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오. 다만 이제 와서 꼭 밝혀 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단언컨대 악은 관능적이었지만 결코 천박하거나 짐승처럼 욕정에만 얽매이는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오. 그녀와 정사는 말하자면 몸을 매개로 벌이는 토론이었소. 그저 단순한 토론이 아니라 점점 삼천포로 빠져들어 결국에는 감정적인 호소와 눈물로 끝나는 신파극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토론 말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몸이 내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소. 그래서, 모든 것이 끝나버린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악은 내게 한결같이 고맙기만 한 존재로 남아 있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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