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릴로와 위스키

kalsavina의 인형이야기

by Kalsavina

살다 보면 종종 자존감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존감이라는 건 자존심과는 미묘하게 달라서, 타인의 시점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시점에서 겪는 일종의 사고다. 심한 몸살감기와 다를 바가 없어서, 머릿속에 오한이 들면서 뇌 사이사이가 저려오고 쑤시는 듯한 통증이 일어나 온몸을 괴롭하곤 한다. 그 후유증은 깊고도 길다.

다소 해괴해 보이는 이 사진은, 바로 그 정신적 몸살을 치유하고자 찾아간 경리단길의 바45(bar45)에서 찍은 사진이다. 발베니 잔에 담긴 라프로익 1815 10년산 위스키는 내가 맛본 인생 최고의 위스키였지만, 벌써 맛본 지 7,8년이 족히 지났다. 당연하다. 이 고급진 위스키를 마음껏 마시기에는 턱없이 가난했으니까.

하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모든 성가신 사건들로 인한 두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 위스키가 꼭 필요했다. 그런데 왜 이 자리에 미성년자(?)인 릴로가 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술 마시는 오너야 너 때문에 내가 머리가 다 아프다!!!

이 아가씨의 헐거운 텐션을 고치기 위해 홍대입구역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여길 들러 위스키를 주문했다는 뜻이다. 그 결과 탄생한 이 해괴한(?) 콜라보가 은근히 마음에 들어서 사진을 찍어놓고 나니 약간은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릴로가 이 곳에 오기 전까지 있었던 곳, 즉 릴로와 지극히 어울리는 장소였던 홍대 입구의 커피숍에서 찍은 사진을 잠시 살펴본다. 극과 극의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장소를 오간 릴로는 오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다시 Bar45로 돌아와서;

그래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사람마다 저마다 삶의 고단함과 피곤함을 이겨내는 각자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예쁜 소녀인형과 맛있는 술 사이에는 분명 설득력있는 연관성이 없기는 하지만, 그 두 가지는 적어도 나를 수렁에서 건져낼 수 있는 존재다. 첫번째 수렁은, 내가 세상에 널리고 널린 흔해빠진 어떤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두번째 수렁은 내가 앞으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공포다. 릴로와 위스키는 그저 그런 현실로부터, 그 현실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가 불시에 튀어나오는 공포로부터 나를 구원한다. 적어도 그 토요일 저녁의 그 시간만큼은 둘 다 내게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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