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잘못된 청혼
15. 잘못된 청혼
“넌 은미 생각만으로 머리가 꽉 차 있는 것 같아.”
가현은 태훈의 말투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며 그를 돌아보았다. 훤칠하고 시원스러운 자태. 핸섬하고 남자다운 얼굴. 어떤 여자가 보아도 반할 만한 청년이다.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었다. 그렇게 멋진 남자로 자란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는 지금 그녀의 말에 화가 난 듯 고개를 돌려 베란다로 쏟아져 들어오는 석양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걱정이 되어서 그래. 벌서 며칠 동안이나 얼굴도 못 보고 전화도 못 했으니까. 친구를 걱정하는 게 이상한 거야?”
“그애가 그냥 네 친구야?”
“얘가 뭘 또 따지듯이 묻는 거야. 그럼 친구지 뭐야? ”
가현은 웃으며 대답했지만 태훈의 태도가 어쩐지 두려워졌다. 그는 고개를 잠깐 숙이고 생각에 잠긴 듯 땅바닥을 내려다보다가 호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물건을 꺼냈다.
“자, 이거 생일 선물이야. 진작에 주려고 했는데, 계속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생일빵을 하던 날에도 태훈은 가현에게 선물을 주지 않았다. 가현은 영문도 모른 채 그가 내미는 선물을 받아들었다. 선물은 예쁜 립스틱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립스틱의 뚜겅을 열고 붉은빛이 도는 윤기나는 립스틱 덩어리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예쁘긴 한데, 나한테는 안 어울릴 것 같아. 은미나 줄까부다. 아니지, 그애한테는 빨간 색이 더 어울릴까?”
“널 위한 거야.”
“너도 참, 나 이런 거하고는 거리가 먼 거 잘 알면서.”
태훈은 가현이 앉은 의자 앞으로 다가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보며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가현은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태훈이 뭔가 중요한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지만 그 내용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우리, 결혼하자.”
“.....뭐?”
“결혼하자구.”
가현은 매우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그의 눈을 응시했다. 얘가 갑자기 뭘 잘못 먹은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농담일까? 그녀는 태훈이 씨익 웃으며 ‘짜식아!’하고 그녀의 이마를 쿡 쥐어박기를 기다렸다. 태훈은 그저 근심스러운 기색을 안면 가득히 띄운 채 그녀의 안색만을 뚫어져라 살필 뿐이었다.
“너, 그거, 진담이니?”
“진담이야.”
“에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픽 웃는 그녀에게 태훈은 사정없이 소리쳤다.
“농담이 아니야! 난 지금 너한테 진지하게 프로포즈하는 거야. 넌 몰라. 내가 너 때문에 사실은 립스틱이 아닌 반지를 준비했었다는 걸. 하지만 나 너한테 반지를 끼워 주기 이전에, 한 번이라도 네가 이걸 바른 모습, 다른 여자애들처럼 예쁜 네 얼굴을 보고 싶었어. 넌 네가 예쁘다는 걸 모르니까. 그래서 네게 먼저 립스틱을 준 거야. 그걸 바르고, 내 반지 받아줘. 결혼해서, 네 합법적인 보호자가 되어서, 언제나 널 떠나지 않을 거라는 네 믿음대로 널 지켜주고 싶어.”
비록 말하는 어투는 화가 잔뜩 나 퉁탕거리는 목소리였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진심을 느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가현의 안색은 차츰 일그러졌다.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슬퍼하는 기색을 띠던 그녀의 표정에 이윽고 노기가 서렸다.
“난, 그렇게 못해. ”
“왜 못한다는 거야? 내가 싫어?”
“태훈아!”
자신을 찍어누를 것 같은 태훈의 모습을 보고 가현은 그만 겁에 질리고 말았다. 그녀가 무서워하는 것은 폭력이 아니었다. 그녀는 태훈이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누구보다도 소중한 친구의 하나뿐인 마음이 두려웠던 것이다. 자신을 생각하는 태훈의 마음,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어떤 상처를 입을지 모를 태훈의 마음이 두려운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가장 많이 의지하는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말해야 이 덩치 크고 마음씨 고운 친구를 영영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네가 싫은 게 아니라......결혼이 싫은 거야. 너도 알잖아. 지금 우리 나이, 결혼할 나이가 아니라는 거. ”
“그래도 할 수 있어. 적어도 부모 동의 없이 결혼할 수 있는 나이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꼭 내 입으로 말을 해야 해? 나는 아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을 앓고 있어.”
“골수 이식 수술 하면 돼. 최 과장님께서 말씀하셨어. 너한테 맞는 골수, 찾아냈다고, 검사 안 해 봐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희망이 보인다고 하셨다고.”
순간 가현의 눈에서 환희의 빛이 반짝였다. 그러나 그 빛은 잠시 반짝였을 뿐, 희미하게 빛나다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 혼자 사는 건 의미가 없어. ”
“가현아.”
가현은 웃으며 태훈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웃음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고 자조적이었다.
“나도 알아. 나는 여자로 태어났고, 지금은 이렇게 남자아이처럼 행세해도 언젠가는 여자로 살아야 한다는 거 나도 알아. 그래서 항상 속으로 일정한 시기를 정해두고 있었어. 언젠가 정말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때는 여자가 되자. 하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사람은 남자가 아니었어. 여자였지.”
태훈의 가슴 속 한 귀퉁이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난 여자가 아닌 남자로서의 나를 느껴. 이건 비극이지.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마저 그 비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비참해. 너 역시 나한테 있어 단순한 친구는 아니야. 넌 내 오빠이기도 하고, 또 형이기도 했어. 다시 말해서 친형제 같은 친구였어. 정말로 혈육으로서의 형제애가 느껴질 정도야. 그건 은미에게서 느끼는 것과는 달라. 언젠가 그애는 자기는 괜찮으니 나보고 아프지 말라고 했고, 나는 미안하지만 아픈 네가 좋다고 했어. 내 욕심 때문에. 하지만 그애가 아파서 죽어 버리는 건 원하지 않아. 그애가 죽는 걸 볼 바에는 같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야.”
“그깟 근친상간의 희생물 따위가 너보다 더 소중하단 말야? 그깟 얼굴만 반반한 요사스러운 계집애 때문에 네 목숨까지 내던지겠단 말이야?”
“뭐? 근친상간?”
가현의 얼굴에 아연실색한 표정이 완연하게 떠올랐다.
“그래! 최 과장님과 은미 어머니가 하는 얘기를 들었어. 채은미의 친부모가 이부남매지간이었다고 했어. 이부남매가 뭔지 알지?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만 같은 남매 말이야. 은미 어머니가 그 애 친엄마가 아니란 것쯤은 너도 알겠지.”
“너.......너......”
“그 애는 진짜 레즈비언이야. 자기 욕심 때문에 널 이용하는 거야. 그러니 그애한테서 마음 떼. 널 사랑하는 남자이기 이전에 네 친구로서 충고하는 거야.”
그 순간 가현의 얼굴에 떠오른 기묘한 표정은 도저히 문장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넋이 나갔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침착한 표정이었고, 그렇다고 냉정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심한 동요의 빛이 눈가에 서려 있었다. 그녀의 온 몸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주먹이 불끈 쥐어진 것을 태훈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때 가현과 태훈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태훈은 전화의 폴더를 열어 전원을 꺼 버렸지만 가현은 폴더를 열어 번호를 확인하더니 통화버튼을 눌렀다.
“생쥐 웬일이냐? 무슨 일 있어?”
[있어. 일이 나도 크게 났다. 여기 H병원이야.]
H병원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현의 가슴 속에서 세찬 방망이질이 시작되었다. 그녀가 질문할 필요도 없이 숨가쁜 승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은미가 쓰러져서 지금 병원에 와 있어. 정신이 들었다가 나갔다가 하는데, 정신이 들 때마다 자꾸 네 이름을 불러. 너한테 알리지 말라고 철석같이 부탁했는데 상황을 보니 안 되겠다. 너 빨리 좀 와라. 얠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모르겠다.]
“은미가 쓰러졌다구?”
[그렇다니까. 가급적 빨리 와. 여기 H병원 조혈치료센터 응급실이야.]
휴대폰의 폴더를 닫은 가현은 태훈이 옆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황급히 바지를 갈아입고 뒤이어 티 셔츠도 갈아입었다. 열쇠를 챙겨들고 현관으로 나가려는 가현을 붙잡으며 태훈이 물었다.
“은미가 쓰러졌다구?”
가현은 태훈의 손을 뿌리치며 말없이 엘리베이터로 다가가 버튼을 눌렀다가, 엘리베이터가 금세 열리지 않자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승민은 특유의 기민하고 현실적인 대처 능력을 잘 발휘해 쓰러진 은미를 신속하게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응급조치를 취하는 동안, 가현을 찾으면서도 그녀에게 연락하기를 막무가내로 거부하는 은미를 달래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가 잠시 혼수 상태에 빠진 동안 그는 결국 가현의 휴대폰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은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나친 충격 탓인지, 아니면 갑작스레 악화된 빈혈 증상으로 인한 고통 탓인지 은미는 완전히 평정을 잃고 정신마저 약간 이상해진 상태였다. 그녀는 기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는데, 깨어날 때마다 두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흐느껴 울었다. 보통 사람같으면 얼굴이 붉어지고 눈물과 콧물을 흠뻑 흘렸을 법한데도, 탈진한 그녀는 핏기라고는 없는 얼굴에 약간 붉어진 눈시울을 적시는 가느다란 눈물만을 끊임없이 흘릴 뿐이었다.
“이제는 싫어. 주위 사람들한테 걱정만 시키고, 엄마 아빠만 고생하게 하면서 버티는 건 싫어. 그냥 죽는 편이 낫겠어.”
“그런 말 하면 안 돼!”
승민은 미움과 아픔이 교차하는 착잡한 마음으로 은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비록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라고는 하지만 동성의 친구에게 이렇게까지 심한 집착을 보이는 은미가 얄미웠고, 심지어는 가벼운 경멸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것은 꾀병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경멸과 비슷한 류의 경멸이었다. 그러나 은미의 병은 꾀병이 아니다. 순간순간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가냘프고도 맹렬하게 울려퍼지는 은미의 부르짖음 또한 가식이 아니다. 그렇기에 승민의 가슴은 더없이 복잡한 연민으로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가현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은미는 다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은미가 누운 철제 침대로 다가선 가현은 눈물에 젖은 은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오랫동안 아파했던 걸까. 미간과 이마에 가느다란 주름이 잡혀 있었고 눈 언저리는 눈 때문에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실신한 그녀는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의 보드랍고 땀에 젖은 손이 가현의 손에 잡혔다. 가현은 울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은미의 손을 잡은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나쁜 계집애, 이렇게 아픈데도, 나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거야.....
가현은 은미의 곁을 지키고 있던 승민을 다짜고짜 붙잡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된 일이긴, 외가집에 간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네가 맹꽁이였던 거지 임마. 혹시나 싶어서 와 봤더니 집에 있더라. 집 근처에서 뭘 사가지고 들어가던 길이었나 본데, 몇 마디 얘기도 못하고 갑자기 애가 노래져서 넘어가더라구.”
“그게 다야?”
“그래. 그게 다야.”
“왜 나한테 외가집 간다고 거짓말했는지 얘기 안 하데?”
“아니. 그 얘긴 안 하고, 너한테 비밀로 하라고만 신신당부하더라. 그렇지만 봐라. 지금은 자고 있어서 그렇지. 너 도착하기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울다 기절하기를 열 번은 반복했을 거다. 웬 하소연은 그리도 심한지. 유가현이라는 이름이 열 두 번도 더 나오는 데 아주 귀에 따까리가 앉겠더라. 할 수 없이 널 불렀다. 나 잘했지?”
태훈은 원망스러운 듯 멀찌감치서 승민을 바라보았다. 승민은 승민대로 그렇게라도 상황에 걸맞지 않는 주접을 떨지 않으면 착잡한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가현은 말없이 링겔이 꽂힌 은미의 손등을 살짝 잡았다.
“은미, 많이 아파했어?”
“좀 많이.”
“그래.”
가현은 고개를 쳐들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표정을 승민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왜 그랬던 거지? 왜 그랬을까? 외가집에 갔던 게 아니었어? 일부러 날 피했다는 거야? 왜? 왜? 그녀는 파랗게 청색증이 도는 은미의 입술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네가 깨어나면 나, 널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최 과장님은 아직 안 오셨어?”
어쩌면 시기가 나빴을지도 몰라. 천천히, 은미에 대한 가현의 애정이 식을 때까지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어야 했는지도 몰라. 그게 아니면, 선물이 나빴는지도 모르지. 립스틱 따위를 선물하다니. 그조차도 아니라면, 가현의 어머니가 갑자기 나타난 게 악재로 작용했는지도 몰라. 10년만에 나타난 친엄마 때문에 동요했을 가현의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건 분명히 실수였어. 자기 부모님이 이혼하고 가정이 깨어지는 모습을 어린 나이에 지켜봐야 했던 그애가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 거라는 게 너무 자명한데도 결혼하자는 말을 하필이면 그 순간에 꺼내다니, 내가 실수를 해도 한참 큰 실수를 했어. 게다가 은미에 대한 비밀마저 그렇게 쉽게 밝혀 버리다니.
‘두 사람 이상이 어떤 일을 알고 있다면, 그 일은 이미 비밀이 아니다’라는 속담을 태훈은 새삼스레 떠올렸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자신을 심하게 자책했다. 평소 때라면 결코 그러한 실수 따위는 저지르지 않았을 그였다. 모든 것이 가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언제나 씩씩하고 쾌활하고, 계집아이들이 열광할 정도로 사내아이 같던 가현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애잔함, 거친 행동 가운데 문득 느껴지는 여성적인 모습, 잘생긴 얼굴 한켠에 깃들인 복잡한 슬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태훈 자신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을 지켜 보며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적어도 태훈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그나마 승민이 유일한 사람이었다.
응급실에 있던 은미는 진찰 후 상태가 몹시 나쁘다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곧장 수혈치료를 받기 위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연락을 듣고 헐레벌떡 뛰어온 은미의 어머니는 막 중환자실로 옮겨진 은미의 코에 꽂힌 튜브를 보자 그만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수혈치료 들어갈 거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가현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은미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은미가 누운 침대 다리를 붙잡은 채 기어코 울어버린 것이다. 꺼이꺼이 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느 새 가현도 태훈도, 승민과 알밤도 그 자리에서 눈물을 글썽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얼마나 저 애를 귀하게 키웠는데......얼마나 오랫동안 저 애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속절없이 우는 그녀를 지켜보며 누구보다도 가슴 아픈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태훈이었다. 비록 은미를 싫어하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은미를 키워 온 은미 어머니의 모성에는 그 역시 깊이 감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흐느껴 우는 은미의 어머니의 굽어진 좁은 어깨를 두 손으로 짚었다.
“은미, 죽지 않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은미의 죽음을 내심 바라고 있는 자신에게 경악한 그는 슬그머니 은미 어머니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병실 바깥에서는 맥이 빠진 목소리로 알밤이 승민에게 은미가 했던 말을 되풀이해 들려주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여러 사람 걱정하게 하고, 부모님 고생시키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바보같은 소리!”
승민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초조하게 복도를 왔다갔다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말을 하는 은미의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혼자 몸으로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태어난 아이.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부모를 바라보아야 했을 괴로운 심정, 학교와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게끔 만든 고통스러운 병. 그 모든 것을 한 몸에 받아들이기에는 은미는 너무 가녀리고 연약했다. 이런 마당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단 한 가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채은미, 제발 죽지는 말아라.
은미의 수혈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최 과장은 조용히 가현을 진찰실로 불렀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진찰실로 들어섰다. 은미의 용태에 관한 일이라면 자신이 아닌 은미의 어머니를 불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문제인가? 손님용 의자에 앉은 가현에게 최 과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며칠 전 어머니가 찾아오셨었다. 알고 있니?”
“예.”
“어머니께 네 상태를 말씀드렸다. 네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셨어. ”
최 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병든 자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오랫동안 내버려둔 어머니를 책망했고, 그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보였지만 그는 그런 얘기까지 가현에게 할 수는 없었다.
“글쎄요. 전 관심없어요.”
“다행히 아버지께서도 내게 직접 전화를 하셨었다. 책임은 자기가 다 질 테니 수술이 가능하다면 언제든지 수술해도 좋다고 하셨다. 그러니 빠른 시일 내에 입원을 해야겠다. 수술이 가능할 만큼 병이 완화되었는지 네 몸 상태를 체크해 봐야겠으니까.”
“하지만, 제게 이식할 수 있는 골수를 못 찾아냈다고 하셨잖아요.”
태훈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짐짓 반문해 보았다.
“하나 찾았다. 정밀 검사를 해 보지는 않았지만 거의 99퍼센트 확신하고 있어.”
가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벽에 걸린 인체 해부도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희망의 가능성 때문에 감격한 것이 아닐까 하고 최 과장은 추측했지만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가현은 고개를 돌려 웃음 띈 얼굴로 최 과장을 쳐다보았다.
“은미는요?”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곧.....”
“혹, 찾을 수 있는 희망이 없는 건 아니겠죠?”
최 과정은 섬뜩한 불안감이 가슴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가현을 쳐다보았다. 가현은 보는 사람이 질리게 할 만큼 희디흰 웃음, 차갑고 메마른 웃음을 입가에 담고 있었다. 공포와 절망을 담은 눈은 입과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말씀해 보세요. 설마 찾을 수 없는 건 아니겠죠? 대답해 주세요! 찾을 수 있죠?”
가현의 눈에서 유리알 같은 것이 반짝 빛났다. 최 과장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견디기가 어려워졌다.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묻고 있지 않는가. 찾을 수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가현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로 짧은 헛웃음을 토해냈다. 절박한 감정의 극한에 다다른 사람의 고통에 찬, 흡사 비명과도 같은 웃음 소리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몸을 떨며 말하고 있었다.
“찾아야 돼요. 못 찾으면 안 돼요. 저는, 잃었던 걸 하나하나 찾아가고 있는데, 이제 행복해지려고 하는데......은미는 모든 걸 하나하나 잃어가다니.....그럴 수는 없어요. 선생님, 은미에게 맞는 골수를 찾아야 해요. 꼭 찾아야 해요 선생님, 부탁드릴게요. 찾을 수 있죠? 네? 제가 은미한테서 얼마나 많은 걸 받았는데, 은미 때문에 제가 얼마나 많이 행복해졌는데....그애가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다니......그건 절대 안 돼요.....”
“가현아. 은미 깨어났어.”
최 과장의 진찰실에 다녀온 후 복도에 있는 대기용 의자에 앉아 지친 몸을 애써 가누고 있던 가현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승민이었다.
“깨어났어? 어때? 괜찮아?”
“위험한 고비는 넘겼대. 다행히 주위 사람들도 잘 알아보고. 큰 문제는 없어 보여. 가 봐.”
일어나 허겁지겁 은미의 병실로 들어가는 가현을 보며 승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은미는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여전히 코에 튜브를 꽂은 상태였다. 그러나 눈을 뜬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어머니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가현의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나쁜 계집애, 독한 계집애. 이러려고 며칠 동안이나 연락을 끊고 있었던 거야? 혼자 아프려고?”
처음에는 울 것 같았지만, 막상 은미의 얼굴을 보자 가현의 가슴은 차갑게 얼어붙어 버렸다. 울고 싶은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지난 며칠 동안 자신을 피해 왔었다는 사실과, 그녀가 근친상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갑작스럽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혹 그 때문이었을까? 바보. 가현은 까실까실한 은미의 뺨을 두 손으로 만졌다. 은미의 눈에서 눈물이 배어났다. 그녀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미안해.....”
“뭐라구?”
가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에 귀를 갖다댔다. 코에 꽂혀 입을 가린 튜브 때문에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입술이, 잘 돌아가지도 않는 혀를 움직여서,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몇 번이나. 미안해, 미안해. 모든 게 미안해. 내가 널 사랑한다는 그 사실까지도 미안해.
“미안한 거, 알긴 아는구나?”
짐짓 앵돌아진 가현의 목소리에 은미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제서야 가현의 가슴에 맺혀 있던 빙산이 녹기 시작했다. 가현은 덩달아 웃으며 땀에 젖은 그녀의 앞머리를 자신의 손으로 살짝 헝클어뜨렸다.
“깨어나줘서 고마워.”
“은미 깨어났는데, 넌 안 가볼 거야?”
승민이 태훈의 등을 손으로 탁 치며 그렇게 물었다. 태훈은 금연구역인 병실 대신 병원 로비 한켠에 위치한 흡연실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 태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의자 팔걸이에 달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내가 왜 가. 걔가 내 애인도 아닌데.”
“.....하긴.”
승민은 하하 하고 짧게 웃었다. 태훈은 그런 승민을 흘끔 쳐다보며 아니꼽다는 듯 뇌까렸다.
“그러는 넌 왜 더 오래 있지 않고 벌써 나왔냐?”
“뭐, 오래 있고 싶어도 그애 어머니가 계시니 마음놓고 있을 수가 없었지. 나도 한 개 주라.”
태훈은 승민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담배와 라이터를 내밀었다. 승민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 동안 태훈은 최대한 자신의 죄책감을 숨기려고 애쓰며 가현과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모두 얘기했다. 그녀의 친엄마가 찾아온 것과 그녀의 냉담함, 자신의 프로포즈, 본의 아니게 저지른 은미의 출생에 대한 폭로까지도. 담담하게 듣고 있던 승민은 태훈의 얘기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대뜸 내뱉었다.
“잘했다, 아주 자알 했어. 짜식아. 아무리 프로포즈가 급했기로서니 하필이면 그런 순간에, 그런 식으로 프로포즈를 하는 바보가 어딨냐?”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가 어떻게 했어야 옳았다는 거야?”
승민은 홧김에 다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한숨을 지었다.
“내가 볼 때, 네가 가현이한테 결혼하자고 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어. 설령 너희들 둘이 결혼할 수 있다 해도, 지금은 결혼할 때가 아니야. 군대도 안 갔다 온 주제에.”
“나도 알아. 하지만 뭐랄까.....나는 초조하고 불안해. 가현이는 새 같아서, 내가 긴 줄로 그 녀석 다리를 묶어 놓지 않으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아. ”
“그래서 지금 결혼을 해서 가현이를 붙잡아 둬야겠다? 과연 그런다고 그애가 붙잡혀줄 것 같아?”
“아니. 아니야. 전에, 바로 얼마 전 일이었는데, 가현이가 나한테 자기가 아프다는 걸 고백하고 나서는, 몇 주 동안이나 연락을 하지 않고 자취를 감춰버린 적이 있었어. 결국 가현이가 치료받는 병원을 알아내는 통에 간신히 다시 찾아냈지만, 내가 녀석을 찾아내지 않았다면 그렇게 그 녀석하고 영영 헤어졌을지도 모르지. 난 녀석의 마음을 알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누구에게도, 자신의 가녀린 모습을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 남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주는 것도 싫어하지.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나는 가현이가 날 떠나는 걸 두려워하는 거야. 지금은 내 곁에 있어도, 언제 녀석이 자취를 감출지 그건 나도 몰라.”
“하긴, 그게 유가현의 매력이긴 하지.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 말이야. 사실 그건 은미도 마찬가지고. 벼랑 끝에 선 두 인간들끼리 끌어안은 모습이라니 원.”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야.”
승민은 스프링 할로윈 날 밤 루비 후문에서의 두 사람의 입맞춤을 기억해내고 묘하게 씁쓸한 기분에 젖었다.
“네 기분 이해하지만, 가현이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닌 이상 그애 기분을 존중해 주라구. 지금으로서는, 그 녀석은 채은미가 멀리 떠나지 않는 한 절대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은미에게 감사하는 게 어때?”
“그걸 말이라고 하냐?"
"됐다, 됐어. 그만두자. 그나저나 은미 얘길 가현이한테 했다며? 가현이가 충격받지 않았어?“
“그걸 모르겠어.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안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내 참, 하긴 지금은 그런 것 따질 여유가 없겠지. 사람이 죽다 살아났으니까.”
승민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물려다 그만두고 담배와 라이터를 태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네 염려는 그만둬. 그보다는 네 일에나 충실해. 반드시 결혼이라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도 그 녀석이 네 곁을 떠나지 않게 할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야. 지금으로서는, 그대로 놓아두는 편이 나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잘못되면, 남은 쪽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