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lsavina Jul 26. 2019

핑크 페일 나이트  (pINK pALE nIGHT)

프롤로그








습기를 잔뜩 머금고 부풀어오른 안개로 뒤덮인 강가에 레이첼이 있다. 불안한 눈으로, 줄곧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갈대 사이를 헤치고 다니는 그녀는 분명 뭔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같이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적이 없다. 너는, 그냥 멀찍이서 망을 봐 주면 돼. 아송. 그게 전부야. 네가 달리 할 일은 없어.

그러나 안개 속에 스며든 듯 레이첼의 모습은 내 머릿속 망각의 영역 어딘가로 스며들고 있는 건지, 그 강가의 안개만큼이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다. 단지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시절, 나는 안개 속을 헤매다니는 레이첼을 내버려 둔 채 저만치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국도변 한쪽에 세워 둔 차의 조수석 문짝에 기대서서, 흐릿해진 레이첼의 실루엣을 건성으로 바라보며 나는 혼자만의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사귀던 애인과 심하게 다투었고 결국 그와 헤어질 위기에 처했는데, 어떻게 하면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를 고심하며 휴대폰을 쥔 채 어쩌면 도착할지도 모를 그의 카톡 메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첼은 안 돌아온대?"

그 가시돋친 질문이 수화기 너머로부터 들려왔을 때,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고 되받아친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 결과, 이미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지 삼 년이 지난 이제 와서 혜연의 명령에 가까운 강요로 이런 프랜차이즈 숍에 끌려오고 말았다.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싫어했다. 스타벅스든, 탐앤탐스든, 혹은 요즘 미국에서 핫한 브랜드이며 곧 한국에도 상륙할 예정이라는 블루 보틀스든 간에 나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싫다. 사실은 그냥 커피숍이 싫은 것이다. 할일없는 한량들의 집합소라고 생각한다.

레이첼이 떠난 후, 혜연의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졌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떠나간 사람인데. 혜연에게 있어서 그랬듯 내게 있어서도 레이첼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고, 소중한 친구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떠나겠다는데, 그리고 떠났다는데,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데, 무엇보다도 어딘가 먼 곳에서 행복하겠노라고 그녀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굳게 다짐했던 사람인데.    

항상 그렇듯, 싸움의 근원은 사소하고도 정말 엉뚱한 곳에서 발화한다. 혜연과 나는 서로 전혀 다른 성격과 취향을 가졌지만,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정도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말은, 우리가 둘 다 지다(JIDA)의 팬이었다는 뜻이다. 혜연은 대부분의 그의 팬들이 공통으로 곱는 곡이었던 <Autumn Breeze>를 좋아했지만, 나는 <Starlight>와 <Moonglow>를 좋아했다. <Starlight>를 부른 가수는 내 친구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레이첼이었고, <Moonglow>는 케이트 김이 부른 곡이다.

어째서 지다의 곡을 부르는 가수가 레이첼에서 케이트로 바뀌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나보다 훨씬 더 지다의 열혈 팬이었던 혜연이 주워 온 정보에 따르면, 레이첼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음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뉴욕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태어난 나는 뉴욕에 아직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레이첼의 수수하고 부드러운 음색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적쟎이 아쉬웠지만, 케이트의 목소리 또한 훌륭했다. 공허한 칭찬이 아니다. 케이트가 아니었다면 레이첼의 빈 자리는 더욱 크고 깊은 공허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떠나가는 사람이 없다면 다가와 그 자리를 채워 줄 사람도 없다. 문제는 가수 레이첼이 아니라, 그 레이첼과 동명이인이면서 사라진 내 친구인 레이첼이다. 그녀는 내가 한국에서 정착해가는 동안 내게 힘이 되어 주었고, 그 누구보다도 나를 잘 이해했던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분명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몇 명의 애인을 만났고 그들과 헤어지는 동안, 나는 사람이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여전히 레이첼과의 이별은 회한으로 남아 있다.

레이첼에게 힘이 되어 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었다. 하지만 레이첼을 진심으로 이해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할 말이 없다.



1

적당히 깔끔했지만 적당히 낡기도 했던, 그저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 이상의 느낌을 주지 않던 그 복싱 클럽의 내부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나는 그런 곳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복싱 클럽이 내가 다니던 치과 바로 아래층에 있지 않았다면 그런 곳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세상을 마쳤을 게 분명하다.

그런 곳에서라면,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런 불순한 목적만 가지고 그곳을 드나들게 된 건 아니다. 교통사고로 몸을 크게 다쳐 병원 신세를 지고 난 후, 나는 약해질 대로 약해질 체력을 보충할 필요를 느꼈다. 그런 내게 친구들은 스파링을 적극 추천했다.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만났다기보다는, 그녀를 알게 되었다, 고 하는 편이 맞겠다.

키가 크고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에 군살 없이 날씬했던 그 여자는, 여느 여자들처럼 굴곡이 진 몸이 아닌 상당히 직선적인 몸매를 가졌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눈여겨보게 된 건, 그녀의 외모보다는 그녀의 움직임이 보여주는 완벽한 아름다움이었다. 줄넘기를 하든 혼자서 샌드백을 치든 혹은 누군가를 상대로 스파링 연습을 하던 간에, 그녀가 보여주는 동작들은 한결같이 군더더기가 없고 절도가 있었다. 더도 덜도 없이 딱 알맞은, 필요한 만큼의 힘과 균형으로 유지되는 움직임, 그 움직임이 드러내는 아름다움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강렬하게 나를 압도했었다.

내가 남자들로부터 원했던 것은, 바로 그런 강력한 힘과 아름다움이었다. 물론, 그런 힘과 아름다움을 갖춘 남자는 내 환상 속에서나 존재할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사람들은 결국,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을 안개처럼 모호한 한 줌의 환상을 등 뒤로 움켜 쥔 채 세상을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녀의 모습은, 운동을 마치고 체육관을 나서는 모습이었다. 운동을 마친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운동 중에 입었던 노슬리브 티셔츠와 반바지 대신 트레이닝복을 갈아입은 후 한쪽 어깨에 자그마한 운동 가방을 가볍게 걸쳐메며 체육관 문을 나서는 모습이 가장 좋았다. 계단을 올라와 무심결에 체육관 문을 열다가 체육관 안에서 나오는 그녀와 맞부딪친 적이 있다. 그녀는 고개를 까닥해 보이는 것으로 사과를 대신하고는 가볍고도 날렵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내가 그랬듯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했고, 나는 서둘러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뒤쫓았다. 계단참에서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옆모습, 그 날렵한 몸을 감싼 하얀 후드 집업의 상의와 그녀의 긴 다리를 더욱 길어 보이게 했던 시보리 없는 네이비 블루의 바지의 조화가 눈에 선하다. 어깨에 스포츠가방을 걸머멘 채로 누군가를 돌아보는 그녀의 옆모습은 내게 있어 숭배해야 할 종교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이름모를 여자는, 내게 있어 레이첼과의 원만하던 관계가 삐걱거리게 된 결정적인 도화선을 제공했다.



2

어차피 시작한 얘기니까, 괴롭지만 도중에서 멈출 수는 없다.

레이첼과 그녀의 남자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나의 종교, 즉 '흰 후드집업의 커트머리 여자'에 대해 이야기한 게 실수였던 거다. 그녀가 보여주는 동작 하나하나가 얼마나 균형잡혀 있고 얼마나 군더더기가 없으며 얼마나 절도있고 아름다운지를 그녀의 남자친구 앞에서 열심히 떠들어댄 게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멍청한 짓이었다는 뜻이다. 나중에 레이첼은 내게 전화를 걸어, 자신과 둘이서만 해야 할 얘기를 왜 그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했느냐고 내게 대놓고 화를 냈다.

"내가 널 이해한다고 해서 그 사람까지 널 이해하라는 법은 없어. 그 사람, 대놓고 널 변태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네가 좀 이상한 사람이 아니냐고 했어."

"그래서, 그 사람이 날 만나지 말래?"

먼 옛날 상하이 변두리의 북적대는 뒷골목 어딘가로부터 날아와 느닷없이 서울 한복판에 떨어진 한국말 잘하는 여성스러운 중국인, 이것만으로도 레이첼의 남자친구에게는 내가 충분히 우주적인 존재일 수 있었다. 즉 외계인이나 다름없는 존재, 신기하지만 가급적이면 마주치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훨씬 좋은 그런 존재 말이다. 그러나 레이첼은 여느 때처럼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첼이 내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료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의미에서는 옳기까지 했다. 레이첼이 나를 이해한다고 해서 레이첼의 남자친구까지 나를 이해할 거라 믿었던 건 분명 내 실수다. 내 잘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은 남는다. 어째서 사람들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오고가는 모든 생각을 그대로 타인에게 들려주어서는 안 되는 걸까?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에게도 솔직해지는 것이,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워야 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어디까지나 남자의 아름다움이 아닌, 내가 반한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해 레이첼과 그녀의 연인에게 설명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레이첼의 연인은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게이로서의 나를 대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고 한다(그 사람이 나한테 반하면 어떡하냐는 농담까지도 해가면서). 그랬던 그가, 남성의 아름다움이 아닌 여성의 아름다움, 그러나 결코 전형적이지 않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내 말을 들으면서 느꼈을 모종의 배신감에 대해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3

여자의 영혼을 타고났다고 해서, 애써 여자처럼 머리를 기르거나 원피스를 입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물론, 전세계의 여성들 그 중에서도 아시아 여성들이 겪어온 지난한 차별의 역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복장 규정에 있어서만큼은 남자 쪽이 여자보다 훨씬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여자들이 라이더 쟈켓에 청바지를 입고 커트머리로 거리를 활보한다 해서 그녀를 일부러 돌아보며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남자들이 긴 머리에 원피스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할 경우 어쩌면 경찰이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각오마저 해야 한다.

언젠가, 레이첼이 내게 자신이 입지 않는 원피스 한 벌을 준 적이 있었다.

어느 늦은 겨울 밤 조심스럽게 그 옷을 입어본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놀랐다. 의외로 그 원피스가 내 몸에 잘 맞았고, 심지어는 어울리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모습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결국 나는 원피스를 장롱 속 깊숙히 집어넣어 버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자의 옷을 입거나, 여자들처럼 롤이 잔뜩 들어간 세팅펌을 한다거나, 핑크색 핸드백을 들거나 하는 일은 내 일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남자의 몸으로 태어난 여자라고 해도.

하얀 후드집업의 커트머리와는 결국 친구가 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레이첼과 그녀의 연인에게 하얀 후드집업 커트머리에 대한 얘기를 했다가 레이첼에게 전화로 타박을 들은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복싱 클럽을 그만두고 말았다.




4

키는 작다. 반대로 길고 네모지게 각진 얼굴은 영락없는 말상이다. 뺨과 콧등에는 동양인들에게서 보기 드문 주근깨가 덕지덕지 내려앉아 있다. 몸은 마른 편이다. 이게 바로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지극히 평범한 동양인인 내 모습이다.

일식집 요리사라는 내 직업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나를 일본인으로 오해한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화가 나는 건 아니다. 국적 따위야 아무려면 어떤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만다. 껍질을 벗긴 생선의 지느러미 사이로 들이미는 사시미칼에 딱히 더 힘을 주지도 않는다.

벌써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 오랜 옛날, 한 남자에게 반해 무작정 고국을 떠나왔었다. 방송국 취재진 틈에 섞여 내가 살던 도시의 뒷골목을 찾아온 그 남자는 웃는 얼굴이 섬세하고 선량했다. 하얀 후드집업의 커트머리가 보여준 그런 류의 간결하고 절제된 힘과 아름다움이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남자였다. 기회가 되면 한국으로 놀러오라며 서슴없이 내게 자신의 서울 주소를 가르쳐 준 그 남자를 찾아가기 위해 이태 가량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일일이 다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 갖은 고생을 하며 한국에 들어와 그 남자를 찾아갔을 때, 그 남자는 결혼식장에서 나를 맞이했다.

-누구에게나 절망할 기회는 공평하게 찾아오는 거니까.

내가 한국에 오게 된 사연, 그리고 오랫동안 잊지 못했던 그 남자에 대한 사연을 다 듣고 난 레이첼은 별 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내게 그렇게 말했다. 안개 낀 강가에서 돌아오던 이른 저녁이었다. 조수석은 레이첼의 연인의 자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뒷좌석, 그러니까 운전대를 쥔 레이첼을 대각선으로 마주한 자리가 내 자리였다. 마침내 차가 서울로 들어왔을 때, 레이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절망 때문에 뒷걸음질 칠 필요는 없어. 아송.  

서로에게 있어 각각 한국어 선생과 중국어 선생이 되어 주기도 했고 나중에는 함께 영어를 공부했던 그녀. 그녀는 나를 가끔 농담처럼 '뎁'이라고 불렀다. 내가 조니 뎁을 닮았다고 했다. 아니, 닮지는 않았지만 나를 보고 있노라면 영화 <가위손>의 조니 뎁이 생각난다고 했다.

-넌 싫어하는 게 너무 많아.

조니 뎁을 싫어한다고 내가 말했을 때,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그렇게 말하던 레이첼의 웃는 얼굴이 눈에 선하다. 유일하게 나를 완벽하게 이해했던 친구. 하지만,

대체 그녀는 내게 무슨 오해를 했던 걸까. 무슨 착각을 했던 걸까. 나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떻게 그녀를 혼란에 빠뜨렸던 걸까.    




5

후드집업 커트머리에 대해 떠들었던 그 사건 이후, 레이첼과의 연락은 차츰 뜸해져 갔다. 만나서 거리를 함께 활보하거나 안개가 낀 강가를 찾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레이첼은 안개가 낀 날이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 서울 근교에 있는 어느 양평인가 하는 고장 부근에 자리잡은 강가에 같이 갈 것을 청하곤 했다. 일하는 시간과 겹칠 때면, 휴가를 내서라도 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먼 옛날, 그녀가 알던 어떤 사람이 그 강가에서 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했다. 차가 강 아래로 전복되어 떨어진 사고였다고 했다. 소중한 사람이었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사람에 대해 두 번 다시 묻지 않았다. 결혼식장에서 나를 맞이했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레이첼에게도 그런 존재가 없었으리라는 법은 없다.

레이첼은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반드시 그 강가를 찾았고, 그럴 때면 나는 가능한 한 빠지지 않고 그녀와 동행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기 반 년 정도 전쯤 해서는 그녀는 더 이상 내게 전화를 걸어와 안개 낀 강가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떠오르는 건, 비도 오지 않는데 우산을 쓰고, 집요하게 수풀 속을 헤치며 뭔가를 찾아다니듯 몸을 구부리고 돌아다니던 레이첼의 모습이다. 분명 찾아야 할 것이 있었음에 틀림없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물어볼 용기는 내지 못했다.

"네 마음이 많이 비틀려 있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끼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서 빼내면서 혜연이 말했다. 바야흐로 2018년과 2019년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를 일러주는 물건이었다.

"조금쯤은 친구들의 안부 정도는, 챙겨 줘도 좋잖아? 아송."

아마도 혜연마저 떠나고 나면, 내 곁에는 나를 '친구'라고 규정해 줄 존재가 더 이상 남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혜연은 아직 내 눈과 귀와 손이 미치는 차원에 머물러 있는 친구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남은 친구라고 할 수 있다.

"그 여가수 말이야."

"응?"

"레이첼하고 이름이 같은 가수. 전에 지다의 '어텀 브리즈'를 불렀다는 가수."

"아, 그 레이첼? 갑자기 그 레이첼은 왜?"

"우리 친구 레이첼처럼, 그 레이첼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 했지?"




6

떠나간 레이첼이 말했던 대로, 나는 싫어하는 게 아주 많은 사람이다. 그 가운데에는 양치질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전, 싫어도 반드시 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면도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양치질을 싫어한다. 면도의 경우는 수염이 아주 천천히 자라기 때문에, 매일 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그나마 양치질보다는 낫다.

침과 뒤섞인 치약을 수돗물로 헹궈내면서, 역겨운 기억들 또한 깨끗이 지워내려고 한다. 꼭 게이로서의 사생활과 관련된 기억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레이첼로부터 화제를 돌리기 위해, 할 수 없이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레이첼의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다. 내게는 수수하고도 애잔한 목소리로만 남아 있는, 그 실체 없는 존재에 대해서. 다행히 혜연은, 지다 씨의 인스타 라이브에 참여한 덕분에 그 애잔한 목소리의 주인에 대해 나보다는 더 잘 알고 있었다.

또 다른 레이첼, 애잔한 목소리의 주인은 일찌기 그 재능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떠나면서 다시 음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녀의 절친이었던 뮤지션은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고 한다. 어쩐지 나와 레이첼, 내 친구였던 디자이너 지망생 레이첼의 사연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그 뮤지션, 또 다른 레이첼의 친구였던 그는 어쨌든 게이는 아니다. 혜연은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 만지작거리다가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어쩐지 <원팩더블> 같지 않아? 그 레즈비언들 이야기 말이야."

"글쎄, 잘 모르겠는데."

들어본 적이 있긴 하지만, 나는 책을 읽지 않는다. 한글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한자도 싫고 알파벳도 싫다. '글자'라고 불리는 것들을 다 싫어한다. 그런 나를 두고 레이첼은 종종 '투덜이 스머프'라고 불렀다. 그 투덜이 스머프 그림을 보기 전까지, 그게 뭘 말하는 건지 몰라 오랫동안 궁금해했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한 그 파란 심술쟁이 꼬맹이. 비록 그림에 불과하지만, 정말 한순간 동질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내가 일할 때 쓰는 하얀 모자는 그 스머프라는 꼬맹이들이 쓰는 모자처럼 하얀 색이다.

"그 이야기에 쌍둥이 여가수들이 나오잖아. 여가수라기보다는, 여가수 지망생과 그녀의 여동생 자매 말이야. 둘 다 훌륭한 재능을 가졌지만, 동생인 수연 쪽은 자신의 재능을 살리길 원하지 않았어. 레이첼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어쩌면 목소리도 레이첼의 목소리와 닮지 않았을까? 반대로 언니인 지연은 자신의 재능을 포기하지 않았지. 아마 그녀의 목소리는, 케이트의 목소리와 닮지 않았을까 싶네. 어쨌든 말이야. 나는, 레이첼 그러니까 우리 친구 말고 가수 레이첼 말인데, 그녀가 꼭 돌아와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있잖아."

내 말에 혜연은 가느다란 눈썹을 찌푸려 보였다.

"아송, 내 말 잘 들어. 지금 지다씨의 보컬 레이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맞지? 아니 우리 친구 레이첼에게도 해당되는 얘기겠지만 말이야. 어느 쪽이건 간에, 한 가지는 확실해. 지쳐서 떠났건 지겨워서 떠났건 혹은 절망해서 떠났건 이유는 수십 가지로 추측 가능하지만, 사람들의 아쉬움이라는 건 말이지. 그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한 이유 치고는 하찮은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아? "

"그게 어째서 하찮은 거야?"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어서 아쉬워하는 게 아니니까. 그들은, 뭔가를 아쉬워한다는 감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두고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거거든. 일종의 자기 최면과도 같은 거지. 하지만 그런 아쉬움에 도취된 사람들 중에서 레이첼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난 그게 궁금해."

혜연은 레이첼의 오랜 친구였고, 나와는 달리 레이첼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레이첼이 나를 완벽하게 이해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혜연은 나와 달리, 그런 레이첼이 떠났다는 사실에 대해 애통한 마음을 손톱만큼도 내비치치 않았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말이다. 아마도 나를 배려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결국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혜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7

누군가가 떠나가지 않으면, 누군가는 그 자리를 대신해 빈 자리를 채우지 못한다. 나는 레이첼이 아닌 케이트가 부르는 '로우(Low)'를 좋아했다. 케이트가 아니었다면, 떠나간 레이첼의 빈 자리가 얼마나 공허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어느 쪽 레이첼이건 간에 말이다. 심지어는 미국 시트콤 <프렌즈>에 나오는 레이첼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레이첼에게 나의 그리움을 보낸다. 딱 오 초 동안만. 기나긴 인생과 견주어 볼 때, 오 초는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사실은 터무니없이 짧다. 그리고 시트콤 <프렌즈>는, 내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 <프렌즈>의 여주인공 레이첼을 포함하면, 내게는 적어도 세 사람의 소중한 친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모두, 레이첼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들.

"보컬 레이첼에 대해서는 그렇게 정리하고, 우리의 레이첼 얘기로 돌아가면."

아, 애써 화제를 돌린 보람이 없다.

"나, 다음 달 중순에 런던에 갈 거야. 레이첼을 만날까 해. 안부라도 전해줄까 하는데. 뭐 레이첼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전해 줄 거라도 있다든가. "

"런던에 간다고 레이첼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아, 지난 주에 연락이 됐어.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더라. 런던에 오면 연락하라고 하면서, 꽤나 반가워하던 걸. 아송 네가 잘 있는지도 물어 보던데?"



8

싫어하는 것이 많은 나의 지론으로 규정짓자면, 선명한 레드 컬러가 아닌 모든 종류의 립스틱은 립스틱으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 '페일 핑크'라는 해괴망칙하게 허여멀건 색의 립스틱을 바르고 나타난 레이첼을 보고 내가 기겁을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내가 만성적인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았을 때, 레이첼은 대뜸 이렇게 빈정거렸었다.

"페일 핑크 나이트네."

"응?"

"너, 페일 핑크라면 질색을 하잖아. 허여멀건 분홍색이라고 하면서. 너한테는 그 불면증으로 하얗게 새는 그 밤이 페일 핑크 같은 밤일 거 아냐."

그렇다. 창백한 분홍색 밤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실로 끔찍한 밤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야 하는 동물이고, 어떤 다른 종류의 동물도 그 점에서 예외가 있을 수는 없다.

뜬금없이 창백한 분홍색 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혜연의 편에 보내기 위해, 레이첼을 위한 선물을 샀다. 페일 핑크,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허여멀건, 미미한 분홍색의 노트였다. 노트 안에는 가로줄이 쳐져 있다. 언젠가 레이첼은 내게 가로줄이 쳐진 노트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학교 다닐 때, 심심하면 공책에 곧잘 이런저런 낙서를 하면서 놀았어."

종이와는 비교적 거리가 먼 환경에서 자랐던 나로서는, 공책에 낙서를 하는 게 놀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 도리어 레이첼이 조금 어이없어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다시 가로줄이 그어진 공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무런 선도 없는 하얀 백지는 싫어. 불안해. 반대로 세로줄과 가로줄이 교차하면서 칸을 만드는 그런 공책도 싫어. 답답하거든. 나한테는, 이 가로줄만이 나한테 필요한 유일한 규칙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써 내려가는 내 인생이 기울지 않게 잡아주는 선, 그것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 뭐 다른 게 필요하겠어?"

창백한 분홍색 공책을 펴들고, 악보에 자리잡은 오선마냥 가로로 질서정연하게 내달리는 가로줄을 훑으며 나는 생각한다. 이게 너에게 필요한 유일한 규칙이었단 말이지. 하지만, 미안해. 너는 나를 완벽하게 이해해 준 유일한 친구였는데, 나는 너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애시당초 노력이라는 게 부질없다는 이유로, 널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그때 넌 아마도 많이 지쳐 있었을 테고 많이 지겨워하고 있었을 테고 많이 절망하고 있었을 테지만, 나는 그렇게 추측가능한 수십 가지 이유들 중 어느 한 가지도 떠올리지 못했어. 단 한 가지 이유도.



9

사람들로부터 듣는 찬사가 재능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가정 하에, 나는 '재능이 있는 칼잡이'이다. 일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이 일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 몇 번 가게를 옮기긴 했지만 언제나 일자리는 있었고, 딱히 일을 그만두어야 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단, 아버지의 부고를 받고 장례를 치르러 중국에 잠시 들어갔다 나온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젠 한국 사람이 다 되었네."

내게 돌아갈 곳이 없어졌음을 알리는 여동생의 한숨 섞인 푸념을 뒤로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마 다시 중국에 갈 일은 없을 터였다.

다시 재능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여가수 레이첼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애잔하고도 애틋했다. 그리고 내 친구 레이첼에 대해 사람들은 그녀가 아무것도 포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그녀에게도 포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갈등했던 재능이 있었다.

이제 와서 레이첼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먼 곳에서 행복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이 곳으로 돌아와야 하는 건가. 하지만, 이건 반칙 아닐까? 레이첼, 적어도 너의 빈자리를 대신해 줄 케이트를 내게 보내 줘야지? 누군가는 사람들을 위한 무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거 아니야. 하다 못해 이런 페일 핑크 나이트, 아니 핑크 페일 나이트인가? 어느 쪽이건 간에, 불면증이 점령한 나의 끔찍한 밤을 위해 전화를 걸어 줄 케이트가 필요해. 서로의 애인에 대한 길고 지루한 푸념을 밤새 늘어놓으면서 창백한 분홍색 불면증 따위는 걷어차 지구 밖으로 날려보내 줄 그런 친구 말이야.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을 접어둔 채, 나는 떠나는 혜연을 배웅하러 공항으로 갔다. 그리고 탑승 게이트를 빠져나가려는 그녀에게 얇은 노트를 내밀었다. 레이첼에게 대신 전해 달라는 말과 함께.




10

런던에서 돌아온 혜연은 내가 일하는 회전초밥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다행히 애인이나 다른 친구를 동반하지 않았다. 브레이크 타임 직전이라 손님도 거의 없었다. 마침내 한숨을 쉬며 칼을 닦기 시작하는 내게 혜연은, 내가 그녀로부터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 왜 레이첼이 널 데리고 양평까지 갔었는지 아직도 모르지?"

양평이라면, 레이첼이 나를 데리고 갔던 그 안개 낀 강이 있는 곳이다.

"누가 죽은 자리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마 레이첼한테는 중요한 사람이었을 거라 생각했고."

"그리고?"

"그게 다야. 더는 아는 거 없어."

"아, 그래."

혜연은 한 입 베어 문 광어초밥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레이첼의 전공이 뭐였는지는 기억나?"

"기억나. 디자인, 을 전공했었다고 했어. 언젠가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디자인하는 회사에 입사해서 일하고 싶다고 했고."

"맞아. 바로 레이첼이 다녔던 대학의 교수였어. 그 애의 스승이었지. 아니, 스승이었다는 표현은 필요없겠다. 스승이라고 불렸던 천하의 개잡놈."

"뭐?"

"천하의 개잡놈이었다고. 그 강가에서 죽은 놈 말이야."



11

-네가 아는 대로 레이첼은 디자인을 전공했어. 그 디자인학과의 교수였고, 레이첼은 그의 직속 제자였지. 레이첼은 그 교수를 무척 존경했어. 아마 짝사랑했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레이첼은 그를 많이 따랐어. 그가 만년필 마니아라는 걸 알고 비싼 만년필도 선물했다고 하더라고. 자기 이니셜까지 새겨서 말이야. 하지만 그 정도는 아무 문제도 될 게 없었지. 정작 큰 문제를 일으킨 건, 그애가 교수의 꾐에 넘어가서 자기가 애써 디자인한 도안을 교수에게 넘겼다는 거야. 아마,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으니 교수님이 이걸 좀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하고 부탁했겠지. 국제 디자인페어 공모전에 낼 생각이었다고 했어. 문제는 그 교수란 놈이 그 디자인을 멋대로 빼돌린 거야. 그 비열한 개새끼가, 글쎄 레이첼의 소중한 디자인을 자기 이름으로 의장등록까지 해 버렸다니까?

-그래서, 레이첼은 어떻게 했어? 그 사실을 알고?

-아주 의외의 반응을 보였어.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예상했을 법한 그런 방식으로는 화를 내지 않았어. 그냥 그게 그렇게까지 할 만큼 대단한 작품인 줄 몰랐다고 했어. 예상하지 못한 방식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확인을 했으니까 그걸로 된 거라며.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범죄야.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고! 그래서 레이첼이 정말 그 일을 그렇게 대충 넘긴 건 아니겠지?

-레이첼은 그럴 생각이었나 본데, 가족들이 그 사실을 알고는 펄펄 뛰었어. 그 교수놈이 도용한 레이첼의 실내조명등 디자인이 대히트를 쳤거든. 남의 디자인을 훔쳐 떼돈을 벌어들이는 꼴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고 펄펄 뛰었지만, 증거가 없잖아. 그게 원래 레이첼의 디자인이었다는 증거가 남아 있지 않으니까. 다들 별 수 없이 포기하고 있었는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불거졌어. 그 교수가 도용한 디자인이 하나가 아니었던 거야. 말하자면, 그 교수한테 그런 식으로 당한 사람이 레이첼 말고도 한둘이 아니었던 거지. 결국 그들이 모두 힘을 합쳐 집단으로 소송을 걸었는데, 그 소송에 레이첼이 끼어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그리고, 법원에 고소장이 들어간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 일이 터진 거지. 그 교수놈의 차가 강가에서 전복된 채로 발견된 거야.

-레이첼은, 그 곳에 갈 때마다 뭔가를 계속 찾아다녔어. 그게 뭐였을까?

-아마, 자기가 그 교수한테 줬던 만년필이 아니었을까 싶어. 레이첼의 말로는 죽기 전에 그 만년필을 돌려받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돌려받지 못한 게 아닐까 싶어. 여하튼, 그런 일을 겪기 전까지 레이첼은 우리가 지금 아는 그 레이첼이 아니었어. 무척 순진무구하고 발랄했지. 그래,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스러웠다고 해야겠다.

-레이첼은 왜 나한테 그런 얘길 안 해줬을까.

-그때는 널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니까. 그 당시 넌 지금만큼 한국말을 잘 하거나 잘 알아듣지는 못했을 테니까, 너한테 구구절절 설명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한 거 아닐까? 어쨌든, 그 사건에 대해서는 나나 다른 사람들도 레이첼한테서 긴 얘기를 들은 적이 없어. 레이첼의 주위로부터 전해들은 게 거의 절반 이상이었어. 그러니 네가 레이첼한테서 그 얘기를 직접 듣지 못했다고 해서 그걸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12

혜연과의 긴 통화가 끝나고 나서야 나의 실수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나의 결정적인 실수는, 레이첼의 연인이 듣는 앞에서 레이첼에게 하얀 쟈켓 커트머리에 대해 떠든 것이 아니었다. 바로 레이첼, 그녀에게 하얀 쟈켓 커트머리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았어야 했던 거다. 옆에 애인이 있었건 누가 있었건 그런 건 그녀에게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아니 그게 문제였다 해도, 그녀 자신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녀의 어리석은 친구 아송, 그녀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믿고 모험을 감행했다가 어이없이 허허벌판에 홀로 남겨진 이른바 '낙동강 오리알' 출신의 중국인 게이 아송이 철딱서니 없이 과거 그녀가 저질렀던 잘못을 되풀이하는 꼴을 보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게다가 그 멍청한 게이 녀석은 학습능력도 없는지,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모자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참이었다.

물론, 나는 그 하얀 쟈켓의 커트머리에게 반했다.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게이인 내가, 남자가 아닌 분명한 여성의 성별을 가진 생물을 사랑하고, 연인이 되고, 그녀와 잠자리를 갖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애시당초 사귈래야 사귈 수가 없는 존재에게 어떻게 배신을 당하며 어떻게 버림을 받으라는 건가.

우리는 종종, 예측을 불허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이성과 판단력을 상실하곤 한다.

그리고 열에 들떠 떠드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그 시점에서, 레이첼은 내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게 분명했다. 집요하게도 절망을 모르는, 낯선 사람을 쫓아 들어온 타국에 잘도 눌러앉은 이방인. 싫어하는 것도 많고 예민한 주제에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매혹의 대상을 찾아내는 몽상가. 누군가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바보.

아마 그녀 자신은, 그때쯤 해서는 수렁에 매몰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한 차례의 처절한 배신이 가르쳐 준 혹독한 경험 이후로도, 결코 그녀 자신만큼은 매몰되지 않으려고 또 애썼을 그 절망이라는 수렁 말이다.



에필로그



-페일 핑크네.

나를 대신해 혜연이 전해 준 그 노트를 받아든 레이첼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송 녀석이 건재하다니 참 다행이야. 그렇게 떠나와서 미안했다고 전해 줄래?

센스 없게도 연필은 안 주고 노트만 주냐는 타박을 잊지 않고 전한 레이첼은, 그래도 영국에는 좋은 필기구가 많으니 괜찮다며 안심하라고 전했다고 한다.

혜연은 내게 만약 레이첼이 한국을 방문하면 만날 거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꼭 만나야 한다면 레이첼 대신 케이트를 만나겠다는 농담으로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의 시덥쟎은 농담에 혜연은 픽 웃을 뿐 이상 재차 권유하지 않았다.

얼마 전, 고양이를 입양했다. 스코티시 폴드를 들일까 하고 생각했으나 마땅한 녀석이 나타나지 않아 아쉬운 대로 삼색 얼룩이를 들였다. 최근에 헤어진 애인이 고양이 털 알러지를 앓고 있었는데, 그가 내 집을 나간 덕분에 나는 고양이를 기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설마 녀석에게 레이첼이나 케이트라는 이름을 붙인 건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 면상에 어퍼컷을 날려주고 싶다. 녀석의 이름은 '투덜이 스머프'로 정했다. 하지만 너무 기니까 그냥 '투덜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고양이 이름치고는 나쁘지 않다.

핑크 페일 나이트(페일 핑크보다 핑크 페일 쪽이 입에 훨씬 잘 붙는다)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끔찍하게도 창백한 분홍색 밤. 하지만 그리운 레이첼의 목소리, 오래 전 사라져간 그 하얀 쟈켓 커트머리의 옆얼굴, 또 최근에 알게 된 근사한 남자의 완벽한 어깨 라인 등을 떠올리다 보면, 역시 어떤 식으로든 절망은 이겨낼 가치가 있는 거라고 굳게 믿게 된다.

레이첼이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단 하나의 규칙만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떠나보내지 않으면, 결코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규칙 말이다. 단념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냥 단념하고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 설령 그것이 상실감이든, 배반감이든, 혹은 허망함이든 간에 말이다.

이 자리를 빌어 내 친구 레이첼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좀 더 절실하게 널 그리워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내 모든 생각을 숨김없이 펼쳐보였던 걸 용서하라고. 살다 보면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불행하겠지만, 너의 가로줄, 너의 유일한 규칙이 되어 줄 사람에게 의지해 너 자신이 기울어지는 걸 막아가며 살아갈 거라 믿는다고.

정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나는 오늘도 그렇게 믿으며 창백한 분홍색의 밤을 지새운다. 그리고 사라진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불필요하고도 무의미한 노력에 대해서 생각한다. 잠든 투덜이의 등을 쓸면서, 케이트가 들려주는 지다씨의 곡을 들으면서.

창백한 분홍색 밤을 끔찍하지 않게 보내는 방법을 나는 그런 식으로 터득해가기 시작한 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말하는 고양이와 불행한 남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