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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Apr 29. 2021

밀크 블루 캔디 11 -(3)

11 -(3)


어차피 피할 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하케는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나를 이 곳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나 또한 거세게 저항하지 못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갑자기 눈이 부셔서 눈을 떠 보니 침대 옆 스탠드를 켠 하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자?”

“잠이 안 와서.이 바람 소릴 들어 봐.”

나는 귀를 기울였다. 아니나다를까 바람이 미친 듯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바람을 맞으며 하케와 함께 밤거리 어딘가에서 노숙을 하는 상상을 하자 끔찍했다. 그쯤 되면 싫어도 서로를 끌어안아야 했을 것이다. 바로 그 바람이 마침내 이 방까지 침입해 들어오려는 참이었다. 갑자기 이 방이 거대한 방공호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던 거야?”

“글세. 한 30분 됐나.”

“뭘 원하는데?”

그는 대답 대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답지 않았다. 바로 그때가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 하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으나 내내 하지 못했었다. 지금이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에는 가장 적절한 상황이다 싶었다. 잠들었다 깨어난 몸이 조금은 노곤했지만 그 정도는 참아야 했다. 

“넌, 왜 슬라이로부터 도망치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왜 그로부터 끊임없이 쫓겨다녀야 하느냐고 묻는 게 옳았다. 하케는 역시 내 예상대로 담배부터 피워 물었지만 대답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답변을 열심히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역겨워서.”

그렇다면 그는 참기 힘든 역겨움을 피해 도망다니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굳이 그렇게 필사적이어야 할 이유는 있을까.

“그러면 난, 참기 힘든 역겨움으로부터 널 지키고 있는 거네.”

내가 약국에서 파는 구토 완화제인가. 그러나 내게는 다른 질문이 아직 남아 있었다 .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네가 그토록 역겨워하며 도망쳐다니는 사람들은, 적어도 내가 아는 대로라면 너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왜 역겨운 거지?”

하케는 의외로 별로 뜸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역겨워하는 건 그들이 아니야. 그들이 내게 요구하는 거지.”

“그들이 너한테 뭘 요구하는데? 섹스?”

섹스라고 되물은 것은 그저 단순한 예시에 불과했지만, 그 예시는 완전히 빗나가지는 않았다. 

“바텐더 녀석은, 이젠 그런 걸 원하지 않아. 그들이 요구하는 건, 그냥 섹스가 아니야. 사랑을 달라는 거야. 그들이 달라는 사랑은 내가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너하고 하는 것처럼, 놀이공원에 같이 가거나 이런 곳에서 밤을 새는 정도의 간단한 미션이 아니거든.”

“참기 힘들 정도로?”

“그래, 참기 힘들 정도로. 역겹고, 무서워. 나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하케는 담배를 비벼 끄고 눈을 감았다. 피곤해하고 있다. 그에게도 수면이 필요했지만, 어느 새 잠들어버린 나와는 달리 그는 거의 자지 못했나 보다. 그래서 말했다. 

“이제 망은 내가 볼 테니까. 네가 자. 슬라이 따위 얼씬도 못하게 할게.”

웃으라고 한 농담이지만 하케는 웃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내가 두려워하던 고백을 했다. 

“나 말이야. 그 놀이공원의 야시장에서 아무래도 널 강간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

“알고 있어.”

정신적인 강간이 그대로 육체적인 사정을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마도 어떤 물리적 자극이 있었을까. 어쨌든 일어난 일이고, 내 몸을 더럽히거나 상하지는 않았으니 괴로운 일은 없다. 허심탄회한 고백의 끄트머리에서 괴로워하는 쪽은 그였다. 

“그런 거야. 그런 것들이 날 역겹게 하는 거야. 뭐랄까, 슬라이를 경멸하지만, 사실은 내 안에도 슬라이가 있어. 나를 역겹게 하면서 두렵게 하는 어떤 음흉한 녀석이 내 안에도 버젓이 살아 숨쉬는 거야. 어둡고 탁한 녀석이지.”

놀라운 대답은 아니다.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또다른 존재를 또렷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자각하는 능력이 있다. 하케는 그걸 견뎌내기 힘든 것이다. 놀이터를 좋아하고 비누방울을 불며 중력을 거스르는 회전열차를 즐기는 그가 견뎌내기 힘든 음탕하고 추한 존재다. 그렇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 또한 버릴 수 없는 그 자신이었을 테니까. 

“다행히 넌, 내가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존재에 몰두하고 있어서, 안심하고 내가 달라붙을 수 있었지. 붙들릴 염려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그 존재를 너에게서 떼어낼 생각은 없어. 하지만.”

그는 불을 껐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지만 형광등에 남은 빛의 잔재가 어슴푸레가 남아 완전한 어둠은 생성되지 않았다. 그가 자리에 누우면서 이부자리가 바스락거리며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어떤 식으로든 슬라이를 막고 있어. 그게 설령 나의 연인들이건, 혹은 내 안에 있는 녀석이건 간에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너한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거지.”

그대로 어둠 속에 앉아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늘 하던 대로 내 팔꿈치를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나는 뒤로 젖혀지듯 눕혀졌다. 어젯밤 눈물에 젖어 있던 하케의 얼굴을 보며 가슴아파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에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바람이 낙엽처럼 밟히는 새벽녘의 거리 어디쯤에서, 유안이 나를 비웃고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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