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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May 28. 2021

16. 비루한 인생, 고귀한 선율, 그리고 고마운 선물

kalsavina의 테마에세이

누자베스의 음원 라이센스가 중단된 건 핑계라면 핑계고, 사실은 극심한 의욕부진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듣고 며칠을 보내는 동안 문득 클래식 그러니까 정확히는 피아노 연주가 듣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그 상황에서 어떤 연주를 들어야 할지도 몰랐을뿐더러 유튜브나 음원 파일로 피아노 연주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잠깐의 서글프고 간절한 마음이 어떻게 하늘에 가 닿았던 걸까. 안양에 계신 혜영쌤, 이혜영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그 전화를 받고 나서야 내가 동완쌤, 하동완 선생님 연주회의 연주회장 위치와 시간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걸 알았고 선생님은 감사하게도 표를 양도해 주셨다. 다시 생각해봐도 신기하기만 하다.


큰 연주회장에서 하는 공연도 몇 번은 갔지만 작은 홀에서    열리는 연주회를 더 좋아하게 된 건, 음악을 귀가 아닌 온몸으로 듣기에는 작은 홀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공기를 흔드는 소리의 진동과 연주자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다. 몸에 영양분이 전달되는 느낌으로.

나는 클래식에 조예가 없다. 피아노에도 문외한이다. 분석하고 비평하며 듣는 식견이 없다. 연주자가 연주를 틀려도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몇 년 전 소규모 홀에서 열렸던 동완쌤의 연주(바이올린과 협주로 기억한다)를 들은 후로는 피아노 연주회를 나름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최대한 귀와 마음을 연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며 소리로 전달되는 에너지를 최대한 내 몸으로 받아들인다.


현실은 언제나 비루하고 궁상맞으며 처량하고, 문득문득 자존심 상하고 서글퍼지는 순간이 수도 없이 찾아온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고 앞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로 나이만 속절없이 먹어간다.

하지만 음악은, 피아노의 아름답고 고귀한 선율은 잠시나마 그런 현실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한다. 내게는 난해하지만 그래서 신비로운 선율이 잠깐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그런데 오늘은 그 선율이 자꾸 나를 울렸다. 사실은 가기 전부터 내가 오늘 울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진짜 이 사람들이 다같이 떼지어 독심술을 하는가. 듣다가 울기 좋은 곡들만 골라서 연주하신다. 무려 여덟 명의 연주자가, 네 대의 피아노를 쓰면서, 짝을 지어 번갈아 연주하다가 결국은 여덟 명이 다 같이 모이는 방식으로.


음악에 집중하느라 사진은 거의 안 찍었지만 우리 동완쌤 사진은 찍어야 했다 첫 연주 시작 직전에 찍은 사진

드보르작과 피아졸라와 라벨과 브람스와 생상스......혜영쌤이 오셨으면 참 좋아하셨겠다는 생각이 든 건 나중이고 나는 그냥 울었다. 피아졸라를 들으면서 자꾸 지난 주에 피아노 연주 듣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게 떠올라서 울었고, 꾸질꾸질한 나와 어울리지 않게 힘차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선율 때문에 울었다. 라벨의 <볼레로>는 내게 의미깊은 곡인데 세상에, 이걸 네 대의 피아노로 여덟 명의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걸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클래식을 듣다가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다. 동완쌤과 다른 일곱  피아니스트님들은 연주하시느라 힘드셨겠지만, 이거 듣다가 나도 모르게 울었으니 클래식 감상의 역사를 다시  셈이다.

오늘의 <볼레로>는 진심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피아졸라도(아디오스 노니노?), 생상스(죽음의 무도)도. 아니 그냥 전곡 모두.

마지막 곡은 네 명의 연주자가 한 대의 피아노에 앉아 연주하는 곡이다. 두 대의 피아노에 붙어앉은 여덟 명의 연주자. 이건 사진 안 찍을 수 없지

음악이 상처를 치유한다는 건 과장이다. 음악이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음악은, 좌절과 분노로 격앙된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 혼란으로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을 여유를 되찾아 준다. 바로 그런 피아노 선율을, 정말 고귀하다는 표현이 손색 없이 어울리는 선율을 오늘 이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여러 피아니스트 선생님들께 감사하고, 이혜영 선생님과 하동완 선생님 두 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못생긴 나 대신 예쁜 링메가 동완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번 연주회는 특별히 선물이 금지되어서 꽃과 케이크 등은 가져오지 말아 달라는 당부가 계셨다. 취지를 잘 알기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죄송한 마음이 드는 건 아마도 내가 큰 선물을 받았는데 답례를 못해서....라는 마음 때문이겠지. 정작 나는 말로 못다할 고마운 선물을(심지어 이번이 처음도 아니지) 받고 돌아왔는데 말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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