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진화론 8장
손가락으로 턱선을 따라 내려간다. 피부의 감촉이 느껴진다. 부드럽다. 털이 거의 없다. 고릴라는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다. 침팬지도 그렇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 DNA가 98.8%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털이 없다.
왜일까. 털을 잃었다. 이것은 진화인가, 퇴화인가.
진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사람들은 생각한다. 더 나아진다고. 더 강해진다고. 새로운 능력이 생긴다고.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와 다리가 생기고, 파충류가 날개를 얻고, 원숭이가 두뇌를 키워 인간이 되고. 추가. 획득. 향상.
하지만 정말 그럴까. 거울 속 내 얼굴을 다시 본다. 털이 없다. 꼬리가 없다. 맹장은 쓸모없이 작아졌다. 어금니는 줄어들었다. 잃어버렸다. 줄어들었다. 사라졌다.
이것도 진화인가.
진화의 아버지 다윈을 생각한다. 긴 수염. 깊은 눈빛. 그는 말했다. 자연선택. 적자생존.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하지만 나는 멈춘다. 강한 자? 티라노사우르스는 강했다. 멸종했다. 매머드는 거대했다. 사라졌다. 검치호랑이는 무서웠다. 없다. 강함이 생존을 보장하지 않았다.
반대로 바퀴벌레는 약하다. 3억 년을 살았다. 박테리아는 단순하다. 지구상 어디에나 있다. 쥐는 작다. 번성한다. 약함, 단순함, 작음. 이것들이 오히려 살아남았다.
강함이 기준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준인가.
겨울 나무들. 잎이 없다. 가지만 남았다. 앙상하다. 이것은 나무가 약해진 것인가. 아니다. 효율적이 된 것이다. 겨울에 잎은 불필요하다. 물과 영양분만 소모한다. 차라리 버린다. 봄이 오면 다시 돋는다. 필요할 때만.
진화도 그런 게 아닐까.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것. 키우는 게 아니라 줄이는 것. 복잡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단순하게 정리하는 것.
효율. 이 단어가 떠오른다.
맹장을 생각한다. 충수. 작은 주머니. 오른쪽 아랫배에 매달려 있다. 아무 하는 일이 없다. 가끔 염증이 생긴다. 터지면 위험하다. 수술로 제거한다. 없어도 문제없다.
전문 용어로 흔적 기관(vestigial organ)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쓸모가 있었지만 지금은 퇴화한 기관. 우리 조상이 초식을 할 때 맹장은 컸다. 셀룰로오스를 분해하는 박테리아가 살았다. 발효조 역할을 했다. 소의 위처럼.
하지만 인간은 잡식으로 바뀌었다.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불을 사용했다. 음식을 익혔다. 소화가 쉬워졌다. 맹장이 필요 없어졌다. 점점 작아졌다. 기능을 잃었다.
퇴화했다. 전문가들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본다. 이것은 진화다. 불필요한 기관을 유지하는 것은 낭비다. 에너지가 든다. 세포를 만들어야 하고, 혈액을 공급해야 하고, 면역 감시를 해야 한다. 아무 이익도 없는 기관에. 차라리 줄인다. 최소화한다. 에너지를 아낀다.
효율이다. 진화는 효율을 향한다. 필요한 것은 남기고 불필요한 것은 버린다. 더하기도 진화지만 빼기도 진화다.
제주도에서 새롭게 발견된 용암동굴. 용암동굴 깊숙이 사람이 겨우들어갈 수 있는 좁은 통로에 자리잡은 용암수. 완전한 어둠.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곳에 물고기가 산다. 아마도 옛날에는 바다나 강에 살았다. 눈이 있었다. 하지만 화산활동으로 동굴에 갇혔다. 세대가 지났다. 수백, 수천 세대.
지금 그 물고기는 눈이 없다. 아예 사라졌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피부만 있다. 장님 물고기. 하지만 잘 산다. 더듬이가 발달했다. 화학 감각이 예민해졌다. 진동을 감지한다. 어둠 속에서 먹이를 찾고, 짝을 만나고, 적을 피한다.
눈을 잃었다. 퇴화인가. 아니다. 진화다. 어둠 속에서 눈은 쓸모없다. 오히려 부담이다. 눈을 만들려면 복잡한 유전자가 필요하다. 세포가 필요하다. 에너지가 필요하다. 유지 비용이 든다. 그런데 아무 이익이 없다. 볼 게 없으니까.
차라리 버린다.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쓴다. 더듬이를 키운다. 냄새 감각을 예민하게 한다. 진동 감지를 강화한다. 이것이 효율이다. 이것이 진화다.
눈이 있는 물고기와 눈이 없는 물고기. 누가 더 진화했는가. 밝은 곳에서는 눈이 있는 쪽이 유리하다. 어두운 곳에서는 눈이 없는 쪽이 유리하다. 더 진화한 것이 아니라 다르게 진화한 것이다. 각자의 환경에 효율적으로.
인종을 생각한다. 금기된 주제. 하지만 피할 수 없다. 흑인, 백인, 황인. 외형이 다르다. 피부색, 체형, 얼굴. 왜 다른가.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백인이 더 진화했다고. 문명을 만들었다고. 과학을 발전시켰다고. 어떤 사람들은 반박한다. 흑인이 원형이라고. 인류의 기원이라고. 더 순수하다고.
둘 다 틀렸다. 누구도 더 진화하지 않았다. 모두 똑같이 진화했다. 다만 방향이 달랐을 뿐이다.
아프리카를 생각한다. 적도. 강렬한 햇빛. 일 년 내내 뜨겁다. 자외선이 강하다. 피부암 위험이 크다. 그래서 멜라닌이 필요하다. 피부가 검어진다. 자외선을 차단한다. 생존에 유리하다.
머리카락도 곱슬거린다. 왜? 열 발산. 직모는 두피에 밀착된다. 열이 갇힌다. 곱슬머리는 공간을 만든다. 공기가 순환한다. 더위를 식힌다. 효율적이다.
병원균도 다양하다. 말라리아, 뎅기열, 수많은 기생충. 면역 시스템이 강해야 한다. 다양해야 한다. 그래서 흑인은 면역 유전자 다양성이 높다. 아프리카 환경에 효율적으로 적응한 결과다.
유럽을 생각한다. 고위도. 햇빛이 약하다. 겨울이 길다. 비타민D가 부족하다. 비타민D는 피부에서 햇빛으로 합성된다. 멜라닌이 많으면 합성이 어렵다. 그래서 피부가 밝아진다. 효율이다.
몸도 크다. 팔다리가 길다. 왜? 추운 환경. 베르그만의 법칙. 알렌의 법칙. 큰 몸은 체온 유지에 유리하다. 긴 팔다리는 더운 날 열 발산에 유리하다. 유럽의 사계절, 온도 변화에 적응한 것이다.
동아시아를 생각한다. 온대. 사계절. 온도 변화가 크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산이 많다. 농경이 발달했다. 인구 밀도가 높다.
황인은 중간이다. 피부색도 중간. 체형도 중간. 하지만 효율성이 높다. 얼굴이 작다. 에너지 효율. 수명이 길다. 내구성. 변동성 높은 환경에서 안정성을 택한 것이다.
누가 더 진화했는가. 아무도. 모두 자신의 환경에 효율적으로 적응했다. 아프리카에서는 흑인이 가장 효율적이다. 유럽에서는 백인이. 아시아에서는 황인이. 환경이 다르면 최적 해법도 다르다.
지금은 어떤가. 모든 환경이 바뀌었다. 실내에 산다. 냉난방을 한다. 자외선을 피한다. 비타민을 보충한다. 글로벌화되었다. 혼혈이 늘어난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효율. 새로운 진화가 시작되고 있다.
털 이야기로 돌아간다. 왜 인간은 털을 잃었을까. 체온 조절? 부분적으로 맞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인류학자들은 여러 가설을 제시했다. 수생 유인원 가설. 물에서 살았기 때문에. 기생충 가설. 이나 진드기를 줄이기 위해. 성 선택 가설. 매끈한 피부가 건강의 신호였기 때문에.
모두 맞을 수 있다. 하지만 근본은 하나다. 효율. 털은 비용이 든다. 만들어야 하고, 유지해야 하고, 관리해야 한다. 에너지를 먹는다. 그런데 이익은? 보온. 하지만 인간은 불을 사용한다. 옷을 입는다. 집을 짓는다. 털이 필요 없어졌다.
필요 없는 것은 버린다. 진화의 원칙. 효율의 법칙. 인간은 털을 버렸다. 대신 다른 것을 얻었다. 땀샘이 발달했다. 효율적인 체온 조절. 도구를 사용하는 손. 복잡한 언어. 큰 뇌. 에너지를 재배치했다. 효율적으로.
공감이론으로 보면 더 명확하다. 진화는 환경과 생명의 대화다. 공감이다.
환경이 신호를 보낸다. 뜨겁다. 춥다. 어둡다. 밝다. 위험하다. 안전하다. 생명이 반응한다. 몸을 바꾼다. 행동을 바꾼다. 유전자 발현을 바꾼다. 반응이 반복된다. 세대를 거쳐. 패턴이 생긴다. 공감이 형성된다.
공감은 효율을 추구한다. 가장 적은 에너지로 환경과 공명하는 방법. 흑인의 검은 피부는 아프리카 태양과의 공감이다. 백인의 긴 팔다리는 유럽 기후와의 공감이다. 동굴 물고기의 사라진 눈은 어둠과의 공감이다.
더하는 것도 공감이고 빼는 것도 공감이다. 복잡해지는 것도 공감이고 단순해지는 것도 공감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 아니라 효율이다. 환경과 가장 적은 마찰로 존재하는 것. 이것이 진화의 본질이다.
의지(W)가 있다. 존재하려는 의지. 환경(R)이 압력을 준다. 둘이 만난다. 공감(E)이 형성된다. 효율적인 방향으로. 시간이 지나면 굳어진다. 새로운 형태가 된다. 이것이 진화다.
공감이론은 진화를 재정의한다. 진화는 변화가 아니라 효율화다. 적응이 아니라 공명이다. 생존이 아니라 존재의 최적화다.
밤이다. 불을 끈다. 어둠 속에 눕는다.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다. 동굴 물고기처럼.
하지만 느껴진다. 이불의 무게. 베개의 부드러움. 공기의 차가움. 먼 곳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 시각 없이도 세상을 안다. 다른 감각으로.
만약 내가 평생 어둠 속에서 산다면. 눈이 필요할까. 아니다. 오히려 부담일 것이다. 쓸데없이 에너지를 먹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 그 에너지를 청각이나 촉각에 쓰는 게 효율적이다.
진화는 그런 것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효율적인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 더 나아지는 게 아니라 더 적합해지는 것. 강해지는 게 아니라 균형을 찾는 것.
눈을 뜬다. 어둠에 익숙해졌다. 희미하게 보인다. 창문, 책상, 시계. 시각이 있어서 좋다. 이 환경에서는. 하지만 다른 환경이라면 다를 것이다.
진화에는 절대적 방향이 없다. 더 좋은 것도 없다. 있는 것은 상대적 효율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적은 에너지로 존재하는 방법.
흑인도, 백인도, 황인도, 동굴 물고기도, 털 없는 인간도, 맹장이 작아진 우리도. 모두 같은 원리를 따른다. 효율. 공감. 존재의 최적화.
침팬지에서 인간으로 진화한다. 임계치를 넘어 위상 전이가 일어난다. 진화는 효율성이라고 했다. 위상 전이는 어떻게 설명할까.
환경에 의지에 반응하여 진화요소들이 다양성을 이룬다. 개체마다 다양한 공감을 이끌어 낸다. 그렇게 진화의 다양성을 보인다. 하지만 패턴화되지 않은 다양성은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효율적인 방법을 택한다.
작은 집단의 개체에서 이상치의 개체들이 나타난다. 집단의 다양성의 폭을 키운다. 집단의 공감 에너지를 통해 효율적으로 패턴화된다. 이때 누적된 진화의 에너지가 임계치를 넘으면 위상 전이가 일어난다.
위상 전이는 진화의 다양성이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위상 전이 없이는 무수히 반복되는 진화의 실패와 도전이 뒤따른다.
그렇게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물고기에서 양서류로 파충류로 포유유로 효율적으로 진화를 거듭한다. 위상전이는 진화의 효율이자 공감의 효율적 산출물이다. 공감의 창발. 자연이 갖춘 진화의 시스템인 것이다.
거울을 본다. 내 얼굴. 털이 없다. 맹장이 작다. 꼬리가 없다. 모두 잃어버렸다. 하지만 진화했다. 효율적으로.
나는 이 시대, 이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다. 실내에서 살고, 옷을 입고, 가공된 음식을 먹고, 스크린을 보는. 내 증조할아버지와는 다르다. 그는 논에서 일했고, 햇빛을 쬐었고, 거친 음식을 먹었다. 그의 몸은 그 환경에 효율적이었다. 내 몸은 지금 환경에 효율적이다.
내 아이들은 또 다를 것이다. 더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더 실내 중심의 삶에서. 더 가공된 환경에서. 그들의 몸은 그 환경에 효율적으로 변할 것이다. 눈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스크린에 최적화되면서. 손가락이 더 민감해질 수도 있다. 터치에 최적화되면서.
진화는 계속된다. 방향은 하나다. 효율. 환경과의 공감. 존재의 최적화. 더 나아지는 게 아니라 더 적합해지는 것. 이것이 진화의 본질이다.
당신은 무엇을 잃었는가. 무엇을 얻었는가. 잃은 것도 진화다. 얻은 것도 진화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당신의 환경에서 효율적으로 존재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진화는 과거가 아니다. 미래도 아니다. 지금이다. 당신이다. 효율이다. 공감이다.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