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도시인을 무장해제 시킨 로컬 카페의 '무해한 마음'.
아마 치앙마이로 돌아가기 바로 전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이모는 늦잠 대회 나가면 무조건 우승이야." 조카가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닐 만큼, 나는 자타 공인하는 소문난 잠꾸러기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곳에 온 뒤로는 아침잠이 없어졌다. 그날도 새벽 6시, 이슬이 방울방울 맺힐 무렵 눈이 떠졌다.
창밖을 보니 전날 저녁부터 시작된 비가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아스팔트의 물기가 마를 새 없는 축축한 아침.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접이식 3단 우산을 든 채 밖으로 나섰다.
해외여행 중 이른 아침은 처음이라 낯설었지만,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컸다. 이번 일정은 온전히 '나 홀로' 보내는 시간이었다.
줄곧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기에, 혼자일 때 비로소 에너지가 차오르는 내게는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각별했다. 평소에도 사색을 즐기는 편이라 이 고요한 여유가 반가울 따름이었다.
마침, 태국 유심에 문제가 생겨 데이터가 먹통인 상황이었다. 와이파이가 없으면 '디지털 고립' 상태였지만, 나는 대충 지도 앱에서 눈에 익혀둔 큰길만을 믿고 걷기로 했다. 길을 잃으면 와이파이가 잡히는 가게를 찾거나, 정 안 되면 숙소 사장님께 전화하면 된다는 묘한 배짱도 있었다.
목적지는 있었다. 시골 마을임에도 비행기가 뜨는 작은 공항이 있어 구경도 할 겸, 그 근처에 봐둔 카페를 가보기로 했다.
데이터 없이 낯선 길을 걷는 건 꽤 짜릿했다. 이전에 데이터 없이 홀로 가본 'Ban Jaipang' 때보다 거리가 훨씬 멀어서인지 그 긴장과 설렘의 농도가 더 짙게 느껴졌다. 난생처음 보는 풍경들이 흥미로워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도, 문득 '이 길이 맞나?' 싶은 막막함이 엄습했다.
특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건 동네의 터줏대감들 때문이었다. 한국에 길고양이가 있다면, 이곳엔 '길견(犬)'들이 있었다. 말이 좋아 '강아지'지, 사실 귀엽다고 하기엔 덩치가 산(山)만 한 개들이 대부분이었다.
녀석들이 어슬렁거리며 사람을 쫓아오거나 적반하장으로 짖어대곤 했다. 덕분에 나는 산책하는 내내 적당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긴장과 설렘 사이를 걷다 보니 드디어 도착했다. 'Coffee Box@ Pai'.
세련된 현대식 건물보다는 로컬 느낌이 물씬 나는 곳을 선호하는 내 취향에 딱 맞는 곳이었다. 단순한 카페인 줄 알았는데 크로플부터 브런치까지 다양한 메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부도 마음에 들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이곳의 매력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밖과 안팎의 경계가 모호한 자연 친화적인 인테리어,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우는 고요한 공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평온함이 그곳에 흘렀다.
주문하려는데, 사장님이 의외의 말을 건넸다. " 먼저 드시고 결제는 나중에 하셔도 돼요."
보통의 태국 카페들이 선지급제였던 터라 조금 놀랐지만, 그 느긋한 배려가 고마워 알겠다고 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11월 태국, 특히 빠이의 아침은 제법 쌀쌀하다. 입김이 호호 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 탓에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갓 구운 미니 크로플을 주문했다. 원래는 커피만 마실 생각이었지만, 메뉴판 속 크로플이 자꾸 눈에 밟혀 사장님의 추천을 받아 오리지널로 시킨 터였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있었다.
화려한 기교 없이 담백하면서도 입안에 착 감기는 맛. 쌀쌀한 날씨 덕분인지, 평화로운 분위기 탓인지 몰라도 내가 마셔본 커피 중 손에 꼽을 만큼 훌륭했다.
이어 따끈한 크로플을 한입 베어 물었다.
'아, 여기 찐 맛집이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겉바속촉'의 정석. 뿌려진 시럽은 과하게 달지 않아 담백한 커피와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단것을 즐기지 않는 내 입맛에도 하나를 더 시키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푸릇한 자연과 맛있는 커피,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나는 그 행복감에 젖어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른 일정이 있어 일어섰다. 사장님께 "정말 맛있었다"라는 인사를 몇 번이나 건네고 기분 좋게 가게를 나섰다. 사장님 역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그렇게 기분 좋게 5분쯤 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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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서늘한 감각. 설마...?
나중에 내도 된다는 사장님의 말씀에, 정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와버린 것이다. 부랴부랴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 땀이 하나하나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의도치 않게 '먹튀'를 한 셈이라니.
오픈된 가게 주문대로 달려가니 사장님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셨다. 내가 왜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전혀 모르시는 눈치였다.
" 아니 사장님! 제가 실수로 계산을 안 하고 갔어요! 돈을 안 냈더라고요!"
급한 마음에 바디랭귀지와 콩글리시를 섞어가며 설명하자, 그제야 사장님은 상황을 이해하고는 "아~ 괜찮아요. 괜찮아~"라며 나를 다독이셨다.
미안함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내 모습이 안쓰러우셨던 걸까. 그녀는 돈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놀란 나를 진정시켜 주셨다.
그녀의 따뜻한 배려 덕분에 죄책감으로 진공 압축팩처럼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다시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커피 맛도 훌륭했지만, 그날 나를 진짜 감동하게 한 건 낯선 이방인을 믿어준 그 '무해한 마음'이었다. 이곳은 단순한 맛집을 넘어, 빠이에 다시 와야 할 이유가 되었다.
계산하지 않고 떠난 손님을 믿고 기다려주시는 마음. 실수로 돌아온 손님을 웃으며 다독여주시는 여유. 도시의 삭막한 계산법에 익숙해진 나에게, 그날의 기억은 신선한 충격이자 따뜻한 위로였다.
개한테 물릴까 봐, 길을 잃을까 봐 잔뜩 날을 세우고 걷던 나를 단번에 무장해제 시킨 건, 대단한 풍경이 아니라, 사장님의 무한한 믿음이었다.
팍팍한 계산기 대신 사람 냄새가 나는 곳. 가끔은 이런 투박한 진심이 여행을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것 같다.
혹시 당신의 여행길에서도
만난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대가 없는 신뢰가 건네준,
잊지 못할 따뜻한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