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향신료 대신 익숙한 마늘 향이 건네준 보양식 같은 한 끼.
빠이 여행 중 우연히 만난 한국인 언니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평소 '미식가'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 입맛이 까다로운 그녀가, 이 짧은 여행기간 동안 두 번이나 찾은 곳이라니. 의심의 여지 없는 '찐 맛집'임이 분명했다.
그녀를 따라 'Ayodia restaurant'로 들어섰다.
매장은 로컬 식당이라기엔 제법 넓고 쾌적했다. 점심시간이라 손님이 몰려 친절한 여사장님과 남자 직원 한 분이 감당하기엔 조금 버거워 보이는 상황이었다.
빠릿빠릿한 한국이었다면 어땠을까. 직원을 더 많이 뒀거나,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저기서 호출 벨이 울리고 "사장님 아직 멀었어요?"라는 민원 속에 자리를 뜨는 손님이 속출했을 테지만.
이곳은 어딘가.
느림의 미학이 강물처럼 흐르는 태국, 그것도 빠이(Pai)가 아닌가.
주문하면 식재료를 저 멀리에 있는 텃밭에서 지금 막 캐와서 만드는 것처럼 음식이 늦게 나와도, 주문받을 사람이 없어 하염없이 기다려도, 누구 하나 재촉하거나 얼굴 붉히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그저 이 느긋한 공기를 반찬 삼아 여유를 즐길 뿐이었다.
"언니, 우리 이거 다 먹을 수 있을까요?"
"남기면 어때요, 먹고 싶은 건 다 시키자고요!"
마치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인 양 여자 두 명이 먹기엔 다소.... 아니, 아주 많이 Heavy 할 정도로 욕심을 부렸다. 무려 메뉴 네 개를 시킨 것이다. 혼자였다면 이성의 끈을 잡고 적당히 시켰겠지만, 오랜만에 한국인 말동무에 흥이 오르니 입담과 함께 식탐도 폭발하고 만 것이다.
(아마 한국에서 열심히 뺐던 살이 도로 아미타불이 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부터였을 거다.)
이윽고 음식이 식탁을 채우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국 음식을 꽤 많이 접했다고 자부했는데, 이곳의 메뉴들은 낯선 비주얼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가장 인상적인 건 '모닝글로리 튀김'이었다. 보통 볶음으로 나오는 모닝글로리를 채소 튀김처럼 바삭하게 튀겨 냈는데, 함께 나온 붉은 소스에 찍어 먹으니, 별미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난생처음 보는 썬 드라이 피시(Sun dried fish)가 곁들여진 그린 카레볶음밥 또한 독특한 풍미를 자랑했다.
"사장님, 혹시 고수 더 주실 수 있나요?!"
고수를 사랑하는 우리는 염치 불고하고 추가 고수를 요청했다. 사장님은 흔쾌히 "OK!"를 외치며 접시에 싱싱한 고수를 담아주셨다. 그 넉넉한 인심 덕분에 우리는 더욱더 전투적으로 식사에 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반전은 혀끝에서 일어났다. 겉보기엔 영락없는 태국 현지식인데, 입안에서는 묘하게 한국의 맛이 났기 때문이다. 특유의 향신료 향 대신 익숙한 마늘 향이 감돌아, 한국에서 요리해 바로 가져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태국 향신료에 익숙해진 내 입맛엔 다소 심심하게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향신료에 지친 한국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미각의 피난처'가 되어줄 맛이었다.
우리는 더운 날씨를 핑계 삼아 낮술을 감행했다. 개인적으로는 표범이 그려진 청량감의 '레오(Leo)' 맥주를 사랑하지만, 아쉽게도 병맥주는 '창(Chang)' 뿐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모국어로 마음껏 떠들 수 있는 좋은 사람, 한국이 생각나는 맛있는 음식, 그리고 응축된 더위도 날려버릴 시원한 낮술 한잔이 있는데. 평소 물 탄 듯 밍밍하다고 생각했던 맥주조차 이날만큼은 그 어떤 고급술보다 달게 느껴졌다.
빠이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맛본 한국의 맛. 촌스럽다 웃을지 모르겠지만, 낯선 길 위에서 만난 이 익숙한 마늘 향이야말로 지친 몸과 마음을 일으키는 최고의 보양식이었다.
가끔은 대단한 풍경보다 밥 한 끼가 여행의 전부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화려한 볼거리보다 더 진하게,
혀끝으로 기억되는 그 맛이,
어쩌면 여행에서 가장 오래 남는 흔적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