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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빠이 한복판에서 한국의 맛을 만나버렸다.

화려한 향신료 대신 익숙한 마늘 향이 건네준 보양식 같은 한 끼.

by 나들레



"여기, 내가 5일 여행 중

오늘까지 합해서 두 번이나 온 곳이에요."


빠이 여행 중 우연히 만난 한국인 언니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평소 '미식가'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 입맛이 까다로운 그녀가, 이 짧은 여행기간 동안 두 번이나 찾은 곳이라니. 의심의 여지 없는 '찐 맛집'임이 분명했다.


그녀를 따라 'Ayodia restaurant'로 들어섰다.





매장은 로컬 식당이라기엔 제법 넓고 쾌적했다. 점심시간이라 손님이 몰려 친절한 여사장님과 남자 직원 한 분이 감당하기엔 조금 버거워 보이는 상황이었다.


빠릿빠릿한 한국이었다면 어땠을까. 직원을 더 많이 뒀거나,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저기서 호출 벨이 울리고 "사장님 아직 멀었어요?"라는 민원 속에 자리를 뜨는 손님이 속출했을 테지만.


이곳은 어딘가.

느림의 미학이 강물처럼 흐르는 태국, 그것도 빠이(Pai)가 아닌가.


주문하면 식재료를 저 멀리에 있는 텃밭에서 지금 막 캐와서 만드는 것처럼 음식이 늦게 나와도, 주문받을 사람이 없어 하염없이 기다려도, 누구 하나 재촉하거나 얼굴 붉히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그저 이 느긋한 공기를 반찬 삼아 여유를 즐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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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펼치자마자,

우리의 '고삐'가 풀리고 말았다.


"언니, 우리 이거 다 먹을 수 있을까요?"


"남기면 어때요, 먹고 싶은 건 다 시키자고요!"


마치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인 양 여자 두 명이 먹기엔 다소.... 아니, 아주 많이 Heavy 할 정도로 욕심을 부렸다. 무려 메뉴 네 개를 시킨 것이다. 혼자였다면 이성의 끈을 잡고 적당히 시켰겠지만, 오랜만에 한국인 말동무에 흥이 오르니 입담과 함께 식탐도 폭발하고 만 것이다.


(아마 한국에서 열심히 뺐던 살이 도로 아미타불이 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부터였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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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음식이 식탁을 채우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국 음식을 꽤 많이 접했다고 자부했는데, 이곳의 메뉴들은 낯선 비주얼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가장 인상적인 건 '모닝글로리 튀김'이었다. 보통 볶음으로 나오는 모닝글로리를 채소 튀김처럼 바삭하게 튀겨 냈는데, 함께 나온 붉은 소스에 찍어 먹으니, 별미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난생처음 보는 썬 드라이 피시(Sun dried fish)가 곁들여진 그린 카레볶음밥 또한 독특한 풍미를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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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혹시 고수 더 주실 수 있나요?!"


고수를 사랑하는 우리는 염치 불고하고 추가 고수를 요청했다. 사장님은 흔쾌히 "OK!"를 외치며 접시에 싱싱한 고수를 담아주셨다. 그 넉넉한 인심 덕분에 우리는 더욱더 전투적으로 식사에 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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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반전은 혀끝에서 일어났다. 겉보기엔 영락없는 태국 현지식인데, 입안에서는 묘하게 한국의 맛이 났기 때문이다. 특유의 향신료 향 대신 익숙한 마늘 향이 감돌아, 한국에서 요리해 바로 가져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태국 향신료에 익숙해진 내 입맛엔 다소 심심하게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향신료에 지친 한국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미각의 피난처'가 되어줄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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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훌륭한 '피난처'에서

술이 빠질 수 없었다.


우리는 더운 날씨를 핑계 삼아 낮술을 감행했다. 개인적으로는 표범이 그려진 청량감의 '레오(Leo)' 맥주를 사랑하지만, 아쉽게도 병맥주는 '창(Chang)' 뿐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모국어로 마음껏 떠들 수 있는 좋은 사람, 한국이 생각나는 맛있는 음식, 그리고 응축된 더위도 날려버릴 시원한 낮술 한잔이 있는데. 평소 물 탄 듯 밍밍하다고 생각했던 맥주조차 이날만큼은 그 어떤 고급술보다 달게 느껴졌다.


빠이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맛본 한국의 맛. 촌스럽다 웃을지 모르겠지만, 낯선 길 위에서 만난 이 익숙한 마늘 향이야말로 지친 몸과 마음을 일으키는 최고의 보양식이었다.


가끔은 대단한 풍경보다 밥 한 끼가 여행의 전부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화려한 볼거리보다 더 진하게,
혀끝으로 기억되는 그 맛이,
어쩌면 여행에서 가장 오래 남는 흔적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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