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앱을 끄고 우연히 마주한 다정한 주파수, 그리고 나의 란나 친구들.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터미널 근처 카페에서 쉬다가, 문득 지도 앱을 끄고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싶어졌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님만해민 쪽 낯선 길로 서슴없이 방향을 틀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둑어둑해진 거리 저 멀리서 주황색 불빛들이 별 무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까만 도화지 위에 오렌지색 물감을 흩뿌린 듯 선명한 불빛들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의외의 광경이 펼쳐졌다. 주말도 아닌 평일 저녁, 관광객보다는 현지 힙한 2030 젊은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소규모 구제 플리마켓이었다. 어디서 볼 법한 기성품 대신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핸드메이드 소품은 물론이고, 상인들이 저마다의 안목으로 골라 온 빈티지 의류와 신발, 이국적인 패턴의 카펫과 손때 묻은 장신구들이 저마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외국인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대부분 그곳의 문화를 온몸으로 즐기는 현지 청년들이었다.
'그래, 내가 찾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
시각 디자이너로 일하며 생긴 직업병일까, 아니면 숨길 수 없는 본능적인 취향일까. 공장에서 찍어낸 흔한 제품이 아니라 누군가의 감각이 담긴 소품과 고심해서 골라낸 물건들을 마주하니 심장이 나풀나풀 뛰기 시작했다. 이 작은 마켓을 대체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 아마 상인들 눈에는 '저 사람은 뭔데 아까부터 계속 제자리를 맴도나'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곳이 있었다. 알록달록 색감, 그러나 어디서 보지 못한 세련된 비즈 공예 가판대였다.
'오, 이 사장님 감각이 보통이 아닌데?'
속으로 감탄하며 천천히 구경하고 있을 때, 앳된 얼굴의 사장님이 환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걸어왔다.
"Hi! Where are you from?"
이방인의 기운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국에서 왔다는 짧은 대답에 그녀는 치앙마이가 처음인지 물었다. 5년 전 이곳이 너무 좋아 다시 찾아온 두 번째 여행이라고 설명하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진심 어린 환대를 보내왔다.
사실 나의 영어는 완벽과 거리가 멀었다. 단어들은 듬성듬성 끊겼고, 문장은 자꾸만 길을 잃었다. 서툰 실력에 조심스레 양해를 구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자기도 영어가 서툴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문법은 엉망이었고 표현은 부족했지만, 우리의 대화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녀는 내 서툰 영어를 찰떡같이 다 알아들었고, 나 역시 그녀의 선한 눈빛과 생동감 넘치는 제스처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서로를 읽어내고 있었다.
"여기 있는 거 말고, 네가 직접 골라 볼래? 내가 바로 만들어 줄게!"
그녀가 꺼내놓은 비즈 상자는 보물창고와 같았다. 한국에서는 꽤 큰 맘을 먹어야 했던 커스텀의 기회가 이곳에선 선물처럼 다가왔다. 나는 내 피부색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황갈색 끈을 고르고 우드 톤의 비즈들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골라냈다.
비즈를 고르는 사이, 식사를 마친 그녀의 친구가 돌아왔다. 사장인 그녀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소개해 주었고, 우린 금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의 꽃을 피웠다. 새로 합류한 친구는 사장님보다 훨씬 활발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별거 아닌 서로의 나라말을 섞어가며 숫자와 인사말을 배울 때마다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처음 만난 사이라는 어색함은 어느덧 사라졌고, 우리 셋 사이의 공기는 금세 말랑말랑해졌다.
안 그래도 신중한 성격 탓에 "이거 해주세요, (엮는 중간에) 저 비즈로 바꿔주세요"라고 꽤 까다로운 부탁을 이어갔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환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그녀의 야무진 손끝에서 순식간에 나만의 발찌가 완성되었다.
더 놀라운 건 가격이었다. 내 취향대로 일일이 비즈를 고른 맞춤평 제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미리 만들어둔 기성 제품과 똑같은 가격을 받았다. 수고로움이 더해진 만큼 값을 더 치를 생각이었는데, 그녀의 넉넉한 마음씨에 기분 좋은 덤을 얻은 기분이었다.
하늘이 더욱 짙은 감색으로 물들었을 무렵, 그녀들은 내게 은밀한 초대장을 건네듯 말했다.
"우리 이번 주 목요일에 다른 야시장에도 나가는데, 너도 거기 놀러 올래?"
며칠 뒤 그녀들이 알려준 'Thae Market CNX '를 찾아갔다. 첫 만남의 장소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활기찬 기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낯선 야시장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다가 미리 공유받은 SNS를 확인하며 그녀들의 위치를 찾아냈다. 마침내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이란! 우리는 마치 십년지기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방방 뛰며 서로를 환대했다.
그날 밤은 그야말로 축제였다. 그녀들의 친구들까지 합세해 모임의 판이 커졌다. 내 취향을 저격하는 아기자기한 소품 몇 개를 기분 좋게 '득템'하고 나니, 그녀들이 장난스럽게 제안했다.
"이거 한번 해봐! 꽝이 거의 없어!"
평소 뽑기 운이라고는 도통 찾아볼 수 없는 '지독한 꽝 손'이었기에 처음엔 웃으며 몇 번이나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녀들과 친구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에 못 이겨 20밧(약 800원)을 내고 종이 한 장을 뽑았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게 웬걸. 1등이나 다름없는 100밧(4000원) 당첨권이 나온 게 아닌가!
"와아아아!"
야시장이 떠나가라 환호성이 터졌다. 고작 4,000원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로또에 당첨된 것보다 더 짜릿했다. 우리는 배를 부여잡고 한참이나 웃음을 쏟아냈다. 그 유쾌한 소란에 지나가던 행인들조차 걸음을 멈추고는, 대체 무슨 즐거운 일이 벌어진 건가 싶어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그녀들은 내가 별명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약속이라도 한 듯 머리를 맞대고 태국식 별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태국 사람들은 이름이 워낙 길어 '닉네임'을 주로 쓴다며, 치앙마이의 전통인 '란나(Lanna) 스타일'로 내 이미지에 딱 맞는 이름을 선물하고 싶어 했다.
별명을 고심하는 내내 그녀들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고, 마침내 이름을 결정했을 때는 마치 중요한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완수한 듯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태국어 특유의 성조와 발음이 낯설어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나를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녀들의 생생한 표정만큼은 마음 한구석에 선명히 박혀있다.
밤 11시, 야시장의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지만 숙소가 멀어 돌아와야 할 시간이었다. 이틀 뒤면 귀국이라 사실상 마지막 만남이었다. 아쉬운 작별 인사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오토바이 뒷좌석에서, 나는 밤바람을 맞으며 발목 끝에 전해지는 비즈의 서늘한 무게감을 가만히 느껴보았다.
한국에 돌아온 지 1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우리는 SNS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최근엔 그녀가 새로 입양한 고양이 사진을 보내왔다. 보고 싶다는 다정한 인사와 함께, 치앙마이에 다시 오게 되면 꼭 보러 오라며, 자기가 새로 사귄 이 귀여운 친구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유독 낯가림이 심한 내가 타국에서 현지인들과 친구가 되다니, 다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말이 통하지 않아서, 서로의 배경을 모르기에 더 순수하게 마음의 주파수를 맞출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나의 작은 방 화장대 위에는 그때 만든 비즈 발찌가 여전히 놓여 있다. 무심코 그걸 볼 때마다 치앙마이의 밤공기와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예상치 못한 길 위에서, 예고 없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그런 인연.
당신에게도 문득 안부를
묻고 싶어지는 낯선 친구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