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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Jul 15. 2023

어린 시절 명절의 추억

어제 만두와 녹두전 이야기를 쓰다 보니 엄마, 아빠, 할머니와 살던 때가 떠올랐다. 큰집이던 우리 집은 항상 식구들이 북적였다. 초등학교 4.5학년까지 삼촌, 고모들과 같이 살았다. 결혼하고 한 명씩 떠나갈 때까지 대가족이었다. 제사도 굉장히 많았다. 추석과 설 같은 큰 명절이 아니어도 제사가 자주 돌아와서 엄마가 많이 힘드셨다. 나중에 결혼한 삼촌이 작은엄마와 오셔서 도우셨지만 손님들이 오기 며칠 전부터 집 청소며 부엌정리 제기를 꺼내서 닦아놓는 일 등 남의 눈에는 띄지 않는 기본적인 일들은 항상 엄마 혼자의 몫이었다.


그렇게 일이 많은 집 큰며느리라 그랬는지 어릴 때 엄마와 단둘이 다정하게 앉아 대화를 나눈다거나 놀았던 기억이 전혀 없다. 늘 엄마는 부엌이나 어디선가 일을 하고 계셨으리라. 모처럼 시간이 있을 때는 엄마가 좋아하는 옷을 만드는 일로 바쁘셨다. 무남독녀라 사랑을 듬뿍 받았을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집안의 첫째로 태어난 아기라 할머니와 삼촌, 고모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많이 받았다. 고모는 고모부와 데이트할 때도 나를 데리고 나갔고, 막내 고모도 친구 집에 갈 때 나를 데리고 다녔다. 할머니도 어디든 항상 날 데리고 다니셨고 할머니가 내 친구였다. 난 무남독녀였지만 대가족 속에서 외로움을 모르고 자랐다.


오히려 행사 때마다 찾아오는 많은 사촌동생들이 내 방을 어지럽히고 내 물건을 만지는 게 싫어서 제발 좀 혼자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고종 사촌동생들과는 가깝게 살아서 자매처럼 항상 같이 놀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다른 사촌들은 보모처럼 돌보는 역할을 했다. 내 물건을 만져도 참고 봐주고 시끄럽게 떠들어도 참았다. 무남독녀라기보다 형제 많은 집 맏이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학창 시절에도 친구들이 무남독녀인 줄 몰랐다고 그런 성격이 아니라고 의아해했었다.


설날에는 떡만둣국 와 녹두전을 추가로 더 만들어야 해서 엄마는 두 배로 일이 많으셨다. 미리 방앗간에 가서 불린 녹두를 갈아 오시고 떡도 만들어 오셨다. 밤새 굳어진 떡을 미리 썰어 놓으셨다. 한 줄도 썰기 힘든 그 딱딱한 떡을 한 광주리나 썰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힘들었겠다 싶다. 엄마가 왜 그렇게 항상 화가 나 있었는지 이해가 된다. 나와 아빠는 마루에 있던 난로에 떡을 구워서 꿀에 찍어먹었다.

최비서님의 블로에서 가져온 사진


작은엄마들과 사촌들은 설 전날에 미리 왔다. 난 내 방을 어지럽히고 책상 서랍에 있는 내 보물들을 망가뜨릴까 봐, 언니니까 동생들 주라고 할까 봐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작은아버지댁 사촌들은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같이 놀 수준이 아니라 유치원 교사처럼 작은엄마들이 일하실 때 방해가 되지 않게 돌봐야 했다. 그게 너무 싫고 힘들었다. 집안의 작은 심부름들도 가장 큰 나만 해야 했다.


만두 만들기도 했다. 사실 어린 사촌들을 돌보는 일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만두를 만드는 일이 더 좋았다. 작은 엄마들이 일하면서 하시는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재밌었다. 엄마는 큰 며느리로 이것저것 그릇을 꺼내거나 정리를 하시고 전을 부치거나 만두를 만드는 것 같은 단순노동은 작은 며느리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밤늦도록 만두를 한 없이 만들고 나면 마루에 이부자리를 펴고 다 같이 잤다. 작은 엄마와 엄마는 그렇게 하루 종일 일을 하시고도 밤늦도록 이야기 꽃을 피우셨다. 나도 그렇게 그 이야기들을 듣고 늦게 잠들어 곤히 자고 있으면 새벽부터 부산스럽게 제사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제사 준비를 하시는 동안 난 또 아이들이 방해하지 않도록 내 방에서 놀고 있고 제사 준비가 끝나고 아빠와 작은 아버지들과 유일한 아들인 사촌동생이 제사를 지낸다. 그동안 여자들은 작은 내 방에 둘러앉아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제사가 끝나고 제사상에 올려져 있던 유과와 약과, 사탕들을 바구니에 담으시면 우리는 밥 먹기 전에 단 음식들을 우선 하나씩 먹는다. 어머니들이 상을 차리시고 남자어른들과 아이들이 먼저 밥을 먹었다. 어머니들은 남자 어른들이 식사를 마치면 그 상에 대충 국그릇을 가져와 드셨다. 그렇게 상을 물리고 나면 남자 어른들은 낮잠을 주무시거나 텔레비전을 보셨다. 우리 집 남자 어른들은 참 재미가 없었다. 화투를 치거나 놀이를 하지 않았다. 먹고 조금 이야기 나누시다가 또 식사 때가 되어 밥을 먹고 그런 일의 연속이었다.


오히려 작은 엄마들이 재밌었다. 상 정리를 하고 내 방에 모여서 화장을 하신다. 전 날까지 눈썹도 없이 후즐그레한 모습으로 음식을 하셨는데 모든 일이 끝나자 화장을 하시며 이야기 꽃을 피우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작은 엄마들도 30대 밖에 안 되셨던 거였다. 서로 화장품을 가져다 써보기도 하고 여고생들처럼 한참을 그러고 계셨다.


명절에는 점심때쯤 고모댁 식구들이 온다. 고모부들이 오시면 그제야 술도 드시고 조금 시끌벅적해진다. 꼬장꼬장한 박씨네 남자들은 술도 거의 드시지 않았다. 호탕하신 큰 고모부와 술을 좋아하는 막내 고모부가 오셔야 명절같이 시끄럽다. 어릴 때 외갓집에 온 우리 딸은 고모부가 술을 드시고 얼굴이 벌게져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무섭다고 운 적이 있었다. 싸우는 게 아니고 그냥 말씀하시는 거라고 해도 그런 모습을 처음 봐서인지 무서워했다.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아빠 누구도 그렇게 술을 드시는 분이 없어서 놀랐던 거 같다. 그러던 애가 지금은 술을 어찌나 잘 마시는지...


저녁까지 드시고 엄마가 남은 전이며 만두, 나물까지 바라바리 싸 주시면 가지고 가신다. 그 일이 내가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이어졌었다. 그러다 엄마가 치매 판정을 받고 아들이 있는 작은아버지가 제사를 가져가시고 나서야 엄마는 해방되었다.


명절에 시댁에 갔다 점심때가 지나 부모님 댁에 가면 예전과 달리 썰렁하게 두 분만 계셨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는 늘 사람이 북적였었는데... 아이들도 어릴 때 외갓집에 오면 작은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삼촌들이 있어서 재밌었는데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 밖에 없어서 좀 심심하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쓸쓸해졌다. 엄마와 아빠는 몇 십 년간 제사와 대식구 거두는 일에 지쳐서 오히려 홀가분하신 것 같았는데 나는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친척들이 모일 때는 내가 시댁에 갔다 늦게 가거나 다음날 가게 되어도 크게 신경이 안 쓰였는데 그 이후에는 두 분만 덩그러니 계실 생각을 하면 마음이 불편했다.


3년 전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엄마는 치매가 심해지셔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시고 부모님 집도 사라져 버린 지금 나의 그 모든 과거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아 마음이 시려온다. 부모님과 친척들이 북적거렸던 과거의 시간들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그 속에 있던 젊었던 아빠와 엄마는 어디 계신 걸까?


그때의 부모님보다 더 나이 들어버린 나는 내 속에 살아있는 그 시간들을 가끔씩 꺼내본다. 그토록 활기차고 성실하게 살아내셨던 부모님의 시간들!

부모님에게는 고통스러운 희생의 시간이기도 했겠지만 나에게는 유년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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