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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Aug 12. 2023

처음으로 술 마신 날

- 35년 전 어느 봄날

이번 방학에는 대학 친구들을 자주 만났다. 20세 때 처음 만나 거의 35년간 만남이 이어져왔다. 만난 기간은 오래됐지만 한 친구가 1995년에 결혼 후 바로 미국으로 가는 바람에 그 이후 만난 횟수는 그렇게 많지는 않다. 다른 친구도 대기업에 다니는 바쁜 워킹 맘이라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미국에 살던 친구가 한 4~5년 전부터 한국에 자주 나온다. 친정 부모님 건강이 나빠지시기도 하고 미국에서 교수로 생활하면서 공부하고 일만 하다 보니 이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도 좀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먹고 싶은 한국 음식도 실컷 먹고 친구들도 자주 만나고 싶어서 매년 두 번씩 꼬박꼬박 나온다. 여름 방학 때는 거의 2~3달씩 머물러서 자주 만나고 여행도 같이 갈 수 있어서 좋다.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50살이 넘었지만 만나자마자 스무 살 그 시절로 돌아간다. 다들 교수에 대기업에 다니는 능력자들이지만 이야기하다 보면 철없던 그 시절과 다를 바가 없다. 그때처럼 큰 소리로 깔깔거리고 웃고 서로의 흑역사 이야기를 하고 또 하며 놀려댄다. ‘그때 너 머리모양 이상했잖아’, ‘너 왜 미팅 때 남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안 먹었냐,’ ‘맨날 총알택시 타고 들어갔는데 이렇게 멀쩡히 잘 살아있는 게 참 감사한 일이다’ 등등 끝도 없는 옛날이야기가 펼쳐진다. 옛날 친구들을 만나면 그냥 그때 스무 살 그대로인 거 같다.


매번 만날 때마다 하는 이야기 중에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술 마시고 진상 부린 일들이다. 각자 한 두 번씩 심하게 진상 부린 일들이 있었다. 무슨 속상한 일이 있었는지 너무 취해서 소리를 질러 술집에서 쫓겨난 일부터 걷지도 못할 정도로 취해서 길에서 토하고 친구들이 지하철역에 힘들게 데리고 간 일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매번 그러지는 않았지만 스무 살부터 결혼하기 전 8년 가까이 인생의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운 나이에 만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가 처음으로 술 마신 날 이야기가 나왔다. 입학하고 이 그룹 저 그룹 어울려 보다가 비로소 어느 정도 맞는 친구들과 친해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4월쯤 되었던 거 같다. 대학생이 되었으니 처음으로 술을 마시기로 하고 신촌기차역 부근 주점으로 갔다. 유아교육과 특성상 엠티에서도 술을 마시지 않고 엄청 건전하게 놀아서 실망하고 우리끼리라도 마셔보자 작정한 날이었다. 한 친구는 동아리모임을 하고 왔고 나는 여드름 치료를 받고 벌게진 얼굴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친구들을 만났다.

<부지런한 자스민의 소소한 일상> 블로그에서 가져온 신촌 주점사진인데 내가 갔던 주점과 앉은 자리까지 너무 흡사하다!!


민속주점 같은 곳에서 동동주를 마셨다. 술을 왜 어른에게 배워야 하는지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동동주는 술에 대한 거부감 없이 맛있어서 술술 들어갔다. 안주가 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음료수 마시듯 들이부었던 거 같다. 어느 순간 취해서 막 울었다. ‘부모님한테 잘해야 하는데 난 못된 딸이야’ 그러면서 울었다. 그때까지 조용히 공부하고 대학도 부모님이 원하는 곳으로 가고 그다지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보다 부모님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많이 갖고 있었다는 거를 그날 알게 됐다. 무남독녀라 내가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난 그렇게 울고불고 다른 친구들도 인사불성으로 취했다. 난 그 뒤로 기억이 없다. 친구가 이제 와서 해준 이야기를 들어서 아는 거다. 내가 돈이 있다고 해서 술을 마신 거라는데 집에 갈 때는 다 되었는데 지갑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나에게 아무리 물어도 울기만 하고 가방을 뒤져도 지갑은 나오지 않았다. 그중 술이 세고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던 친구가 당황해서 이 애 저 애 돈이 있는지 찾고 있던 그때 옆 테이블에 있던 어떤 남자손님이 조용히 우리 술값을 내주고 나가셨다고 한다.


난 그 이야기를 몇십 년 만에 들었다. 그날 처음으로 술 먹고 인사불성이 되고 울었던 거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런 뒷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술이 센 친구는 그렇게 천사 같은 분의 도움으로 술값을 내고 우리들을 버스에 태워 보내고 본인은 인천까지 겨우 갔다고 했다. 지금 들으니 내 아이가 그랬으면 등짝 한 대 때리고 싶은 일을 내가 하고 다녔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술값 내준 분이 어떤 사람이냐 젊은 학생이었냐, 어른이었냐 궁금해했지만 다들 취해서 그 이상은 기억해 내지 못했다. 잘못 배운 최초의 음주였지만 고마운 분 덕분에 다들 집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다들 화장기 하나 없는 아기 같은 얼굴에 누가 봐도 신입생 같은 애들이 취해서 주정 부리는 게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으리라. 지금 내가 대학생들을 보면 그럴 거 같다.


그래도 그 시대엔 여자애들이 취해서 울고불고 난리 치는 모습에 눈살 찌푸리고 한심하게 보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참 고마운 분이다. 1987년 4월쯤 신촌 기차역과 이대사이에 있던 주점에서 고딩 같은 여자애들 4명이 술 마시고 주정 부리고 있을 때 술값 내주신 분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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