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
-나의 진짜 욕구 알아보기
현실에서 하고 싶지만 사람들에게 말하기에는 좀 오글거리고 가끔 소녀취향이라는 한 마디로 평가절하 당하기도 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쓴다. 이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쓸데없는 구석까지 파헤치는 여러 마음들과 나의 취향에 맞는 음악과 책, 영화 이야기를 쓴다.
어릴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나눌 친구를 찾아 헤맸다. 누가 그런 아이일까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하며 살펴보곤 했었다. 조금이라도 취향이 맞는 아이라는 판단이 서면 호감도가 상승했다. 그러다 길게 사귀어보면 ‘역시 다 맞는 건 아니 구나’ 실망하기도 하고 취향만 맞다고 다 좋은 친구가 아니라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취향은 같지 않지만 좋은 아이들이 많았고 소울 메이트라는 환상을 쫓는 일은 그야말로 환상이라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면 나처럼 모두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나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표현을 잘하지 못 하는 걸까? 11월이 되면 Guns N’ Roses의 November Rain과 015B의 <떠나간 후에>를 듣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말로 꺼내면 참 오글거린다. 그랬던 친구들도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나만 미성숙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걸까?
산책하면서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그 책이 왜 좋은지 어떤 문장이 와 닿았는지 이야기하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무슨 대단한 비밀도 아니고 이런 음악, 책, 영화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쉽지 않다.
사람들과 만나서 반감을 사지 않을 적당히 가벼운 이야기들을 하고 돌아와 헛헛하고 오히려 더 비어버린 마음을 확인한다. 진짜 이야기, 진실된 이야기는 누구와 해야 할까? 가끔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는데 후회될 때가 많았다. 어렵게 진짜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다지 공감받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비아냥대는 반응이라도 받을 때의 타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와 공허한 마음을 느끼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진지충이라는 요즘 아이들의 농담이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진짜 이야기를 하고 강력한 유대감을 느끼는 일이 전보다 어려운 일이 된 거 같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친구들과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다. 대학교 때까지도 그랬던 거 같다. 교환일기를 쓰기도 했다. 편지에서는 또 다른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평상시 학교에서 만날 때와는 다른 친구의 진지한 면모를 알 수 있고 진짜 속마음을 주고받곤 했었다.
한창 아이들을 키울 때는 아이들 이야기, 특히 성적, 학원, 학교 이야기, 동네의 다른 아이들 이야기가 사람들과 만나서 주로 하는 이야기 주제였다. 그때는 모든 관심이 아이들에게 쏠려있었고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에 저절로 그렇게 흘러갔었다.
나는 없고 그저 누구누구의 엄마라는 정체성만 남아있었다. 그 속에서 생기는 복잡하고 안 좋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를 점점 잃어갔다. 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할 여력이 없었다. 핑계일지는 몰라도 그때는 그랬다. 아이에게 좋다는 걸 찾아다니고 아이 친구 엄마들과 몰려다니며 25년 가까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누구누구의 엄마로 살아야 했기에 진짜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나 자신으로 사람들과 사귀지 못했다. 중간에 아이가 끼어 있었기 때문에 진짜 나를 다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텅 빈 껍데기만 남았고 내가 누구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시간이 조금씩 생기고 나서야 내가 누구였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 듣던 음악도 찾아 듣고 예전 생각이 많이 떠올랐다. 나이 들어 추억에 빠진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니었다. 잃었던 나를 다시 찾아 그러모으는 과정이다.
예전에 좋아했던 것들, 과거의 추억들에 대한 글을 많이 썼는데 지금 생각하니 단순한 추억의 나열이 아니었다. 엄마로서의 정체성만 있는 내가 아니라 진짜 온전한 나의 정체성을 기억해 내고 다시 세우기 위한 과정이었다.
어릴 때 읽고 좋아했던 책들을 기억해 내고 내가 왜 그 책을 좋아했었는지 생각해 보는 일들은 다시 나를 찾는 과정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나를 알려준다.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나,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었던 어떤 성격의 사람이었는지 찾고 다시 짓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