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었다. 하루키 하면 그의 책들과 동시에 ‘달리기’가 떠오른다. 달리기가 취미의 영역을 넘어서 삶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써낸 책이다.
어디선가 본 듯 한 글이 아니라 진짜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내용을 곧바로 받아 써낸 글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 한 글의 짜깁기로 채워진 책에는 옳은 말들이 가득 차있고 과장된 감정이 흘러넘치지만 마음을 두드리진 않는다. 내 글이 자꾸 그렇게 되어 가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선지 이 책을 읽고 나의 글쓰기를 돌아보게 된다. 중독자처럼 책만 많이 읽어서 이게 내 생각인지 어젯밤 읽은 책의 내용인지 뒤죽박죽이다.
생생한 경험을 미사여구 없이 곧바로 받아 적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50대 중반 아줌마의 삶에 그렇게 눈에 띄는 생생한 경험이 많지 않다. 반복되는 일상에 늘 비슷비슷한 경험들이다.
나의 삶에서 직접 길어 올린 단단한 글을 쓰고 싶은데 그런 알맹이가 있는 일을 찾아야 하는데 하면서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러다 그냥 '이게 난데 어쩌겠어'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부모님에게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식에 대한 마음을 다스리고, 인간관계의 문제에 대해 전전긍긍하느라 애쓰는 부족한 나도 내 나름대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니까 이런 글 밖에 쓸 수 없는 게 당연하다는 걸 받아들여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간병할 때 느꼈던 외로움도 생생하게 경험한 것이고 다 큰 아이들에 대한 걱정을 극복해가고 있는 과정도 다 내 삶의 알맹이 들이다.
인생의 기본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하고 마음을 돌보는 일들이 내 글의 주제가 될 수 밖에 없었고 그것만이 내가 가장 진실되게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다. 싫어도 내 삶이고 나의 모습이다.
조금 더 사려 깊고 타인에게 귀감이 될 멋진 경험을 쓰고 싶다는 희망으로 또 다시 날 왜곡하려 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것은 폄하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된다.
내가 쓸 수 없는 글을 찬양하고 부러워하는 대신 그냥 내가 쓸 수밖에 없는 글을 담담히 계속 써나가기로 결정했다.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찾으려는 내 모습은 어떻게든 잘 살아내려는 나의 노력이었지 유치하고 시시한 취향은 아니었다. 그런 걸 좋아하는 게 난데 당당히 드러내도 된다. 그런 글을 계속 쓰겠다. 주변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새나 동물들을 좋아하는 것도 진짜 내 모습인데 사람들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유난 떤다고 보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늘 한편에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그렇게 우회적으로 불편함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 있었다. 부모님도 그런 분들이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감정을 조금이라도 표현하는 걸 불편해하셨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감정이 풍부하고 그걸 표현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었던 내가 철이 들고부터는 표현을 억제하고 쿨한 척을 했다.
그런 작은 것들에 감동하고 호들갑 떠는 글을 막 쓰고 싶지만 그들의 시선이 내면화된 또 다른 나에게는 불편하고 싫은 감정들이 생겨난다. 표현하고 싶은데 그걸 싫어하는 내가 날 자꾸 나무란다. 그래서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쓰고 싶은 마음과 이제 그런 글은 그만 쓰라는 내가 갈등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런 나를 똑 닮은 딸의 감정표현에 불편함을 느꼈었다. 같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이가 큰 소리로 웃고 이야기하는 걸 힘들다고 느끼기도 했다. 나의 모습이 싫은 만큼 그 모습을 보이는 딸의 해맑은 모습이 오랫동안 불편했다.
글쓰기가 어려워진 시기동안 나의 글이 싫은 이유를 생각하면서 결국엔 나의 본모습과 삶의 모습을 여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랜 시간 갖고 있던 무의식적인 태도를 하루 아침에 바꾸기 쉽지 않다. 이렇게 불편한 지점에 작은 깨달음들이 생겨난다. 역시 글을 쓰면서 깨달았으니 계속 써나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