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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기가 제일 어려워요.

by 박수종

<나는 매일 남이 버린 행운을 줍는다>라는 요시카와 미쓰히데라는 쓰레기 줍는 사업가로 유명해진 작가의 책에서 “사랑이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글을 봤다.


정지우 작가의 <사람을 남기는 사람>이라는 책에는 “좋은 대화의 경험이라는 것도 대개는 상대로부터 얼마나 대단한 말을 들었느냐 보다도 상대의 경청에 힘입어 자기 스스로 얼마나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라는 글이 있다.


두 책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와 좋은 대화의 본질에 대해 다른 듯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놔두라는 것이다. 간섭하지 말고 스스로 성장하도록 놔주고 상대방의 말을 조용히 경청함으로써 그가 본모습을 꺼낼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은 대화라는 내용이다.


이토록 쉬운 일을 왜 지금까지 제대로 못해서 많은 문제를 만들고 있었을까 싶다. 아니 안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긴 시간 들으며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공감 어린 추임새 정도만 보내줬을 때 그토록 위로받고 따뜻해졌으면서 나는 상대의 말에 반박하고 방어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왜 아직도 그렇게 자주 드는 걸까?

남의 말을 잘 경청하는 사람들이 상대의 말에 다 동의하고 긍정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저 상대방의 이야기에 담긴 생각을 온전히 듣는 일에 만족할 줄 아는 평온하고 다정한 사람이다.”<100년 뒤에는 우리는 이 세상에 없어요>라는 책에서의 말처럼 그런 사람인 것이다.


예전엔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큰 목소리로 표명하는 사람이 똑똑하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정확히 반대라는 걸 알게 됐다.


나를 잘 관찰하고 나서 알았다. 스스로를 설명하고 이해시켜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상대가 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을 참지 못했다. 그냥 '그러면 어떠리'라는 마음이 어떤 건지조차 몰랐다. 투명하게 날 밝히고 이해시키고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말이 많았는지 모른다.


같은 책에서 “효과적인 듣기란,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간에 끼어드는 버릇을 고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담긴 생각을 온전히 듣는 일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죠”라는 이야기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오랜 세월 동안 무의식적으로 그런 식의 대화를 했던 거 같다. 누군가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는 그 상황과 비슷했던 나의 일이 떠올라 내 이야기를 한참 한다.


최근에 부모님의 간병으로 여러모로 힘든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 친한 후배들부터 고등학교 친구, 지인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비교적 일찍 그 일들을 겪었다. 10년 전부터 지금까지니까. 그러다 보니 꼰대처럼 내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며 나도 힘들었다는 뉘앙스로 자꾸 이야기한다.


그냥 그들의 현재 고통을 잘 들어주고 공감만 해주면 될 것을 왜 다 지난 일을 구구절절 떠들어댔는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후회하면서도 자꾸 반복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충분히 이야기하고 위로받지 못했다는 결핍이 있었다. 나는 그런 힘든 일들을 자세히 여려 번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라 대충 이야기는 했지만 자세히 하지는 않았다. 자세히 여러 번 이야기한 모임도 있긴 했지만 다른 모임들에서는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선지 자꾸 지금 그들의 이야기에 뭔가 억울한 감정이 다시 올라오면서 투정을 부리고 싶은 거 같다. ‘나도 힘들었는데. 그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 나는 힘들겠다, 그렇게 하다니 착하다. 는 소리 못 들었는데’라는 억울함이 있었던 거 같다.


그런 결핍감과 낮은 자존감이 자신에만 몰입하는 여유 없는 사람을 만든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랑을 주기 힘든 것도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자꾸 내 생각과 방식으로 상대를 바꾸고 싶어 하고 남의 말을 진중히 듣고 그저 조용한 공감만 보내지 못하는 이유도 충분히 인정받고 사랑받지 못 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많이 나아졌나 했는데 충분히 해결되지 않은 어떤 이슈에 대해서는 여전히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주변사람들 중 유난히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거나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반복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의 황폐한 내면이 보이는 거 같다. 그들은 자신의 말대로 사람들이 움직이는걸 보면서 그만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착각이라도 해야 겨우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괴로운 사람일 수 있다.


내가 하는 식단이나 물건, 어떤 생각들을 좋다고 인정해 주거나 영향받는 모습에 뿌듯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다. 어쩌다 말이 나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정도는 괜찮겠지만 대화의 대부분이 유난히 자신의 의견이나 권유로 채워지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없는 반감이 생긴다.


한두 번 이야기할 때는 ‘그런 거도 있었구나. 한 번 해볼까?’ 아니면 ‘아 그렇구나, 하지만 나는 별로 흥미가 안 생기는 걸’ 하고 지나갈 수 있는데 매번 만날 때마다 강조하고 꼭 해봐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때는 실제 그 내용의 좋고 나쁨과는 상관없이 압박감이 느껴지며 불쾌해진다.


매번 그런 식으로 만남이 이루어질 때 그곳이 좋고 음식이 맛있었어도 기분이 좋지 않다. 만난다는 것이 중요한데 장소와 음식이 더 우선인 거처럼 어떤 곳을 고집하면 기분이 상한다. 왠지 나의 자율성을 침해받는 거 같다.


이런 일들을 통해 사람들을 대할 때 되도록 상대를 있는 그대로 놔두고 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는 것만으로도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 말없이 앉아 나를 인정해 주는 것 같은 사람 좋은 미소만을 짓던 이들이다.


남편이 그런 편이라 대화라기보다는 혼자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면 남편은 그저 '나 같으면 그런 사람 벌써 안 만났다.' 한마디뿐이지만 그냥 그걸로 내 화가 다 풀린다.


거기에 ‘너는 뭘 그런 거로 예민하게 구냐’라든가 좋은 사람인 척 ‘너그럽게 봐줘라. 그 사람도 사정이 있겠지’ 같은 이야기로 나를 바꾸려 하지 않고 내 말에 대한 동의의 한마디로 내 화가 풀리게 만들어준다. 그저 내 편이 돼주는 무심한 한 마디에 나를 방어하고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 무던한 남편이기에 나의 이 뾰족한 예민함이 많이 둥그러졌다. 물론 말이 너무 없어 독백인가 싶고 답답할 때도 거의 비슷한 비율로 많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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