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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중독, 좋은 중독

by 박수종

사실 요즘에 글로 쓸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다. 그래도 글 쓰는 시간 자체가 좋아서 자주 카페로 나간다. 결과물보다 그런 방식으로 보내는 시간이 좋아서 자꾸 반복하게 된다. 글 쓰는 시간의 몰입감, 그림 그리고 색칠할 때 뿜어져 나오는 현란한 색들의 조화가 그 무엇보다 날 기쁘게 한다.


그런 즐거움이 특정 행동을 반복하게 한다. 결과물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 매일 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중독 돼있다. 좋은 중독이다.


요새 미드 빅뱅이론의 주인공인 셸든 쿠퍼의 어린 시절을 다룬 스핀오프 드라마인 <영 셸든>에 빠져있는데 한 등장인물이 디저트로 늘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는 내용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마침 냉장고에 바닐라아이스크림이 있었다. 등장인물이 먹는 걸 나도 같이 먹으면서 보니까 더 재밌었다.


다음날에도 <영 셸든>을 보는데 전날 먹다 남은 바닐라아이스크림이 계속 신경 쓰였다. 잠깐 망설이다 결국 아이스크림 통 바닥을 보고야 말았다. TV를 보면서 뭘 먹으면 평소보다 많은 양을 먹게 돼서 속이 나빠진다.


그 순간은 좋았는데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어선지 속이 울렁거리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이제는 반값할인 알람이 떠도 아이스크림을 사지 말아야겠다. 이런 중독은 순간은 즐겁지만 결국 소화불량과 죄책감을 일으킨다. <영 셸든>과 아이스크림이라는 불쾌한 조합으로 남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미드까지 속 울렁거림으로 기억되는 게 싫어서 그 이후에는 먹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런 중독과는 다르게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에 중독되는 건 상쾌함과 뿌듯함, 미적 즐거움을 불러온다.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면 뿌듯하고 즐겁다. 브런치에 글이 쌓이고 주제별로 분류 되면서 복잡했던 머릿속 정리도 되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떠나보낼 수 있어 홀가분해진다.


그림을 그리면서 많은 것을 깨닫기도 한다. 새로운 것을 그릴 때마다 그림 그리는 방법에 대해 터득하는 것이 있고 인생의 중요한 진리를 깨닫기도 한다. 새로운 것을 배워나가는 기쁨이 이 나이에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그림을 그리면서 색과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감각이 좀 더 예민해진 거 같다. 예쁜 걸 더 잘 찾게 된 거 같고 사소한 것까지도 색의 조합을 생각하며 선택하다 보니 주변이 좀 더 아름다워졌다.


예전에는 색칠할 때 나무하면 기둥과 줄기는 밤색, 나뭇잎은 초록색, 하늘은 하늘색. 이런 공식이 있어서 그 고정된 생각대로 색을 선택하곤 했다. 그런데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해보니 나뭇잎의 초록색이 그 초록색이 아닌 경우가 더 많았다. 검은색에 가까운 아주 짙은 녹색에서 형광색처럼 빛나는 연한 연두색까지 빛이 닿는 부분과 그림자 진 부분, 나뭇잎 한 장에도 여러 색이 섞여있었다.


자연 속의 동식물들은 그렇게 그라데이션으로 색이 조금이 섞이면서 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한 가지 색으로 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건물을 많이 그리다 보니 벽돌을 그리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벽돌 하나도 그냥 빨간색으로 칠한 적은 없다. 벽돌 하나에도 네 가지에서 다섯 가지 이상의 색이 섞인다. 어떤 부분의 벽돌은 그림자지고 낡은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 두 번 정도 손이 더 가기도 한다.


내 그림이 아직 서툰 어설픈 느낌이지만 그렇게 벽돌 하나하나, 나뭇잎과 꽃잎 한 장 한 장에도 나의 손길이 여러 번 닿다 보니 애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평소 생각하고 있던 사물들의 색이 얼마나 현실과 다른지 매번 느끼는 중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고정된 색으로 칠할 때 그림이 매력 없어지고 납작해진다.


이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마음을 비우고 ‘보이는 대로 그리자, 이게 진짜 무슨 색인지 다른 눈으로 보자’라는 생각으로 대상을 잘 관찰하게 됐다. 오렌지 맛 아이스크림이니까 주황색으로 칠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주황색을 갖다 댔더니 완전히 다른 색이었다. 베이지도 아니고 밝은 느낌의 주황색이 조금 섞인 노란빛도 띄고 크림 느낌의 미색도 섞인 미묘한 색이었다.

아이스크림의 결에 따라 생기는 기포의 어두운 색과 그 주변의 그림자로 인해 검은색이 보이기도 한다. 근데 또 검은색으로 칠하면 어울리지 않고 생뚱맞아 보여 맞는 색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우연히 들른 가게에서 먹었던 아이스크림을 그릴 때 정말 어려웠다. 아이스크림 컵의 일러스트는 오히려 쉬웠다. 평면적인 그림은 그대로 그리고 단색을 칠하면 금방 비슷한 느낌이 난다.


아이스크림이 지금까지 그린 것 중 가장 어려웠다. 그 부드럽고 크리미 한 느낌을 색연필로 살리기 너무 어려웠다. 아무래도 72색으로 부족한가 싶어 100색 색연필을 사야 하나 찾아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그린 아이스크림 그림도 찾아봤지만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아 부족한 대로 일단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단색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그리는데도 7~8가지 색을 썼다. 그런데도 그 느낌이 잘 표현되지 않는다. 어제 이 그림을 그리면서 단순한 사물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가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데 사람을 단지 몇 가지 인상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에만 맞춰 계속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잘못됐는지가 깨달아졌다.


그림을 그리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으로만 그리려고 했을 때 잘 표현되지 못했다. 그림이 단조롭고 밋밋해 보였다. 생각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 대상을 보고 보이는 대로 그리고 색을 찾는 노력을 계속해 나갈 때 현실의 모습과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림 한 장을 그리는 데에도 그런 노력이 필요한데 사람을 대할 때 그런 노력을 했었나 생각해 보게 됐다.


그림 그릴 때처럼 기존 이미지와 색을 지우고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는 진리를 체험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두드러진 특징에만 사로잡혀 그런 모습에 맞는 장면에만 집중하다 보면 내 생각만 맞는 거 같다. ‘그것 봐 내 생각이 맞았네. 저런 사람이지’라는 섣부른 판단을 계속하며 살아온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지만 그림을 그리듯 새로운 눈으로 그를 아주 자세히 천천히 열 가지 열두 가지 색을 칠하듯 살펴봐야 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 대상의 아름다움과 고유한 색을 찾아주는 일이다. 사진을 그림으로 그렸을 때 마음이 더 움직이는 이유는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인 거 같다. 이미 그 대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기에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려고 결심했지만 그런 몇 백번의 손질을 거쳐 찾아낸 사물의 색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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