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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에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다.

by 박수종

인생의 중요한 두 번째 갈림길에 서있다. 50대가 딱 그런 나이인 거 같다. 40대까지는 어릴 때 만들어진 삶의 태도, 가치관으로 좌충우돌하며 살아보는 시기였던 거 같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나 사회에서 주입한 가치관과 기준에 맞는 삶을 쫓느라 자신을 알아볼 겨를도 없이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한다. 그 후에는 사회에서 좋다고 알려주는 것들, 이 정도는 갖추어야 한다는 것들을 갖기 위해 삶을 갈아 넣는다.


그렇게 쫓기면서도 내가 선택했다고 믿으며 고군분투하며 사는 게 40대까지인 거 같다. 그러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나의 손길이 덜 필요해지고 직업적으로도 다음 세대에게 중요한 자리를 내어주는 50대 중반 이후가 또 하나의 거친 태풍을 맞는 시기인 거 같다.


나나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 기로에 서 있는 듯하다. 나도 쫓기듯 직업을 갖고 노처녀 소리 듣기 직전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았다.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에 들어가 내 시간이 좀 생길 만하니 양쪽 부모님들이 편찮아지셔서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시간 이상을 부모님들께 쓰게 되었다. 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부모님 돌보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그 사이 세 분이 돌아가시고 친정엄마만 요양원에 계신다. 이제는 마음은 불편하지만 시간은 많아졌다. 아이들이 여전히 같이 살고 있지만 밥만 해 놓으면 내가 크게 필요하진 않다.

이제는 날씨 좋은 날이면 친구들을 자주 만난다. 자주 만나다 보니 같은 고민을 하고 삶의 갈림길에서 불안해하는 모습이 보인다. 나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여전히 고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비슷한 나이의 다양한 사람들을 보니 어린 시절 모습과는 다르게 두 갈래로 나뉘는 게 보였다.


지난 세월의 상처와 실수를 돌아보고 성찰의 시간을 통해 갈림길에서 용감하게 한 길을 걷기 시작한 부류가 있고 여전히 10, 20대에 머물면서 자신의 상처나 실수를 감추거나 그 상처를 준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움직일 줄 모르는 부류다.

나도 아직 그 상처 주변으로 돌아가는 일이 많아서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리고 정신 차려서 한 걸음이라도 내딛기 위해 노력한다.

그건 지나간 일이고 난 이제 내 의지대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음을 그것도 내일모레면 환갑인 노인에 가까운 어른이라는 걸 일깨운다. 그때 상처 준 사람은 지금의 나보다 어렸고 나도 어렸음을 기억해 내고 그때 그 사람과 나 모두를 용서하고 연민의 마음을 갖으려 한다. 이제는 그 사람을 내 머릿속에서 떠나보낼 생각 쪽으로 옮겨 앉기 위해 노력한다.


내 주변에는 서로 다른 상처를 가졌지만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고 한 단계 올라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친구들이 많이 있다. 그들을 만나면 나도 다시 힘을 내서 더 좋은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인간이 다 그렇지’ 하며 인간적 연민과 배려와 사랑을 보여주는 그들을 볼 때마다 상처가 아물고 나이 들어가는 게 나쁘지만은 않구나 참 편안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이런 이들과 같이 늙어갈 수 있어 참 행운이라는 감사의 마음이 가득 차오른다.


반면 그 갈림길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거나 오히려 저 멀리 떠나온 상처의 자리로 돌아가 늙은 모습으로 20대에나 할 이야기들을 계속 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 이해가 되면서도 속상하다.


오히려 20대에는 어른스러워서 언니처럼 챙겨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었는데 어떤 인생의 풍파가 그녀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사로잡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렇게 어릴 때의 의리로 20년, 30년을 만났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50대의 그녀들을 참아주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여전히 상처를 준 사람들을 비난하고 해답도 없는 넋두리로 나에게도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마저 쥐어짜는 그녀들을 만나려면 가기 전부터 힘이 빠지곤 한다.


말도 안 되는 자랑을 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나 상황에 화를 냈다 한다. 마주 보고 앉아있는 친구가 많이 아팠다고 해도, 다른 친구가 부모님을 돌보느라 힘들었다 해도 모든 대화가 다 자기중심으로만 흘러가고 만다.


그렇게 극명하게 갈리는 두 부류의 50대를 만나보니 그 차이가 보였다.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지고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잘 돌아보고 치유를 시작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두 손 가득 쥐고 있는 고집과 욕심의 허망함을 깨닫고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을 시작한 이들이었다.


나도 부모님의 존재가 소멸해 가는 모습을 보며 많은게 바뀌었다. 인간이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구나. 정말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구나. 얼마나 돈이 많은지 아닌지,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지 아닌지, 빨리 취업이 되는지 아닌 지는 정말 중요하지 않구나. 그냥 내 곁에 건강하게 존재하고 서로 사랑을 주고받고 행복한 순간을 자주 갖는 게 정말 중요하구나라는 걸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 때 부족한 것들, 평생 갖고 있던 콤플렉스 이런 것들의 부질없음이 깨달아졌고 많이 내려놔졌다. 이 시기는 평생 가지고 있던 고집스러운 관념들, 생각들을 점검해 보고 내려놓고 마음의 평화와 여유, 단순함을 추구하고 실천할 시기인 거 같다.


젊은 시절 무의식적으로 외부에서 주입된 가치들을 두 손 가득 탐욕스럽게 쥐고 고통스러워하는 건 자신을 파괴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성장하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50대를 보면 공통적으로 그런 고집스러움이 많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도 없어서 남들의 상처도 잘 못 보는 거 같다. 그저 자신의 불편함만을 느끼며 늘 생존모드로 살고 있어서 이성의 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 무신경한 말들을 내뱉는다. 이유를 모르는 고통이 너무 커서 자신이 타인에게 주는 상처는 미처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심한 병을 앓고 난 친구의 고통보다 늘 자신의 처지가 더 큰 일이란 듯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상처가 어떤 종류일까 생각해 본다. 남들의 고통은 손톱만큼도 못 느끼고 자신의 손톱 밑의 작은 가시를 늘 가장 크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보면서 나 또한 내 상처를 보느라 남들의 고통을 무시했던 적은 없었는지 생각해보게 해주는 반면교사가 되기는 한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법을 끊임없이 배우려 하고 다른 사람의 삶의 모습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상처나 문제는 혼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남들의 상처를 따뜻하게 위로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위한 방법을 늘 고민한다.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책을 읽거나 바람직한 삶의 모델들을 찾아보는 것이든 각자의 삶의 모습 속에서 계속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들은 외부의 소용돌이에 다시는 흔들리고 싶지 않아 마음을 갈고 닦기 위해 매일 노력한다. 종교의 테두리 내에서 그렇게 단련하는 사람들을 보며 종교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매일매일 성경이나 불교의 말씀을 읽고 정진하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 보다 종교에 진지하게 임하면서 말씀대로 따르는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주는 많은 친구와 지인들이 있다. 말씀과는 다르게 일반인보다 더 이기적이고 선민의식 같은 오만함의 악취를 풍기는 사람들 때문에 종교에 다가가다 물러나기를 여러 번 했지만 내 주변에는 종교인의 모범을 보여주는 훌륭한 친구들이 있어 종교의 순기능을 알게 됐다.



질풍노도 같다는 사춘기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이 폭풍 같은 인생의 변곡점에 선 우리 50대가 자신만의 진정한 길을 잘 찾길 바란다. 부디 내 주변만이라도 그런 위기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죽을힘을 다해 나의 길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다짐해 본다. 사랑하는 내 사람들과 친구들이 다 같이 건강하고 평화로운 노년의 길로 들어서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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