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감정의 농도가 옅어져 가고 있다. 몸도 전 같지 않고 잠도 줄고, 머리숱도 줄고 피부도 탄력을 잃는다. 여러 가지 안 좋은 점이 있는데 가장 안 좋은 일은 감정의 농도가 옅어진다는 거다.
어릴 때는 매달 나오는 잡지책 하나로 가슴이 벅차오르고 영화 속 주인공 때문에 며칠을 앓고, 노래 한곡을 몇 백번씩 들으며 기쁜 시간을 보냈는데 더 이상 충만하게 들리는 노래, 영화, 책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잘 만들어진 좋은 영화를 보는 대신 즉각적인 자극을 주는 막장드라마를 보게 된다. 나이 들수록 미각도 둔해져 간이 세어지듯이 강한 자극만이 조금 느껴진다. 참 슬프다. 그때의 진한 감정을 느끼고 싶어 미니멀라이프 한다고 다 버린 전혜린의 책을 중고로 다시 사서 읽었지만 그 느낌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만 깨닫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한 구절 한 구절이 몸에 와서 박히듯이 와닿아 읽고 또 읽었던 책이었다. 전혜린의 책을 읽고 친구와 교환일기를 쓰기도 했다. 지금 보면 오글거리지만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전혜린처럼 지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이해도 못하는 철학책들도 읽어보고 그녀의 사진을 한참씩 들여다보기도 했다. 나의 사춘기는 전혜린이 어떤 상징처럼 자리하고 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기억까지도 희미해져 있었다.
북마마님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사진
그런 진하고 예민한 감정과 감각이 사라져 버린 지금 미루고 미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에 맞는 삶에 적응해야겠다고 결심해 본다. 평화롭고 단조로운 일상을 사랑하려 노력해 본다. 신나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없어도 그 나름의 잔잔한 즐거움에 감사함을 느끼려 노력한다.
내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걸 인정할 때가 온 것 같다. 젊은 척 긴 머리를 유지하고 내 체형에 맞는 중년을 위한 옷은 싫어서 쳐다보지도 않는다. 어울리지도 않을 딸애 옷을 기웃거린다. 젊은이들의 옷이 눈에 들어오지만 입으면 내가 봐도 어울리지 않아 입고 나가지 못한다. 그래서 젊을 때보다 옷 사기가 몇 배나 어렵다. 젊어 보이면서 눈살 찌푸려지지 않고 아줌마스럽지 않은 옷을 찾아 헤맨다! 그런 옷이 있기나 한 걸까?
나이 들수록 왜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잘 참던 일도 욱하면서 터트려 버리는 일이 많아진다. 다행히 나만 그런 건 아닌지 친구들도 이젠 시댁에 할 말을 하게 됐다, 남편한테 그동안의 불만을 터트렸다, 친구와 손절했다 등등 그동안 참았던 일의 역치에 도달한 듯 묵은 감정을 쏟아낸 일들을 자주 이야기한다. 나도 최근에 그동안 참았던 관계들을 정리했다. 참는 일은 결국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다. 젊을 때는 에너지가 많아 참는 일에 에너지를 써도 그냥저냥 굴러갔는데 이제는 힘이 부족하다. 인간관계든 주변환경이든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을 정리하고 단출해져야 할 나이가 된 것 같다.
담낭절제 수술 후 속이 계속 안 좋다. 수술 후 조심하는 기간이 지나고 원래대로 돌아온 듯 외식과 술을 많이 먹고 마셨다. 연말연시라 모임도 많았고 집에서도 편하게 먹고 마시다 보니 기어이 심하게 탈이 났다. 위장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체한데 또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음식이 머물러 있는 듯했다. 내과에서 소화제를 계속 먹는대도 낫지 않았다. 결국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부황을 뜨니 막힌 게 조금 풀렸다. 담낭이 없어 기름진 단백질 음식이 소화가 잘 안 되는데 전처럼 먹었으니 음식들이 장에 머물러 있었던 거 같다. 위장도 전처럼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고 소화액도 적게 나오는 것 같다.
음식도 담백하게 소식을 해야 한다. 사실 벌써부터 알고 있었지만 당장 괜찮으니 계속 미뤘던 일이다. 이제는 진짜 결심을 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1, 2년 사이에 몸의 변화가 부쩍 느껴진다. 그동안은 갱년기네 늙었네 하면서도 사실 크게 다가오지 않았는데 이제는 여러 방면으로 변화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될 때가 온 것 같다. 드디어 노년의 입구에 서게 됐다는 걸!
잠도 줄었다는 걸 받아들이는 중이다. 젊을 때처럼 7~8시간을 깨지 않고 푹 잘 수 없다. 하루 못 자고 다음날 좀 잘 자고 3~4시간 자는 날도 많아졌다. 못 잤다고 불안해하고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을 다독인다. 잠이 안 오면 그냥 불을 켜고 앉아 책을 읽거나 이런저런 일을 사부작 사부작 한다. 그러다 다시 누워 잠을 청해 본다. 대신 낮에 부지런히 몸을 쓰는 일을 하거나 햇빛을 보고 많이 걸으려고 한다. 힘들어도 무조건 나가 걷고 몸을 많이 쓰면 그날은 또 잘 자게 된다.
예전에 친정아빠가 호수공원을 하루에 2시간씩 걷는다고 하셨다. 그때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래야 겨우 살만해지는 거였다. 더 오래 살고 싶어서 건강에 강박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게 아니었다. 그래선지 아빠는 쓰러지신 날까지 건강하게 본인과 엄마의 식사를 챙기시고 집안을 돌보셨다. 모시고 살아보니 치매가 이미 중기가 넘어간 엄마를 돌보며 식사를 챙기시고 집안의 여러 일들을 혼자서 처리하셨던 거였다. 거의 매주 찾아뵙고 반찬과 온라인으로 장을 봐드리기는 했지만 엄마를 모셔보니 정말 힘든 일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걱정할까 봐 늘 괜찮다 할만하다 하시고 혼자 다 떠안고 계셨던 거였다.
코로나가 제일 심하던 시기에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시고 한 달 중환자실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갑자기 돌아가셔서 너무 충격이고 허망했다. 코로나 시기였고 중환자실에 계셔서 몇 번 뵙지도 못했다. 사실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건강하셨던 모습만이 남아있다. 86세까지 남의 도움 없이 건강하게 사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 고생 시키지 않으시고 엄마까지 돌보다 가셨다.
딸은 아빠를 닮는다고 하니 나도 아빠처럼 건강하게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스스로를 챙기고 싶다. 남은 가족들에겐 상처일 수 있지만 본인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것 같다.
이렇게 쓰고 있지만 무너지는 건강과 여러 이상 증세에 조바심이 나고 불안해지기도 한다. 이미 큰 병이 진행 중 인건 아닐까? 전신 건강검진을 받아야 할까? MRI를 찍어봐야 하나? 이런 불안감이 올라올 일이 점점 많아진다. 요즘은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만나도 자주 아픈 이야기를 한다. 누가 어디가 아픈지 어느 병원이 좋은지 가 대화주제가 되는 일이 많아졌다. 다들 당황스러워하고 슬퍼한다. 이것도 인생의 한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시간을 건강하게 잘 건너가고 싶다. 밝고 유머러스하게 잘 건너가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재밌고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 지금 많이 생각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아프다고 맨날 불평하고 찡그리고 자기주장만 되풀이하는 고약한 할머니가 되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 나도 노인이 처음이라 화가 나고 힘들고 아프니 그렇게 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