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만이 내 세상>의 진태(박정민)와 <브레인 맨>의 대니얼 태멋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은 자폐증이나 뇌질환 성향을 가졌지만 언어 사용과 의사소통 면에서 평범한 사람과 비슷하며, 전반적인 지적 능력은 떨어지지만 특정 영역에서 천재성을 보여주는 극히 드문 신경발달장애 현상이나 사람을 의미합니다. 특정 영역은 보통 음악과 미술, 수학 계산, 달력 계산, 길 찾기 등 5개로 나누어집니다.
질병으로 분류되지도 않고, 의학적 진단의 기준도 명확하지 않은 서번트 증후군은 세 가지 유형의 천재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단편 기능 천재'는 진공청소기의 소리만 듣고도 제조사와 모델명, 제조연월일 등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사소한 것을 잘 기억하는 경우입니다. 둘째, '재능있는 천재'는 악기 연주나 그림 그리기처럼 다소 전문적인 특정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경우입니다. 셋째, '경이로운 천재'는 어떤 한 분야가 아니라 두 가지 이상의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경우입니다.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특별한 기억력때문에 서번트 증후군은 영화나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약 30년 전에 개봉한 영화 <레인 맨>에서는 아버지의 유산 상속 문제로 자폐증 형을 돌보게 된 동생이 여행을 하며 진정한 형제애를 깨닫게 된다는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실존 인물인 킴 픽을 모델로 만든 형 레이먼드 배빗 역할을 더스틴 호프만이 맡고, 동생 찰리 역할을 톰 크루즈가 맡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킴 픽은 9,000권이 넘는 책의 내용을 모두 암기하고, 9초 만에 책 한 쪽을 읽으며, 한 눈으로 한 쪽씩(왼 눈은 왼 면, 오른 눈은 오른 면), 두 쪽을 동시에 읽을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서번트 증후군을 앓았던 시온(주원 분)이 소아외과 의사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 휴먼 메디컬 드라마 <굿 닥터>가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최근에는 주먹에 의지해 살아온 전직 복서 형 조하(이병헌 분)와 엄마(윤여정 분)에 의지해 살아온 서번트 증후군 동생 진태(박정민 분)가 17년 만에 다시 만나 한 집에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에 대한 사랑과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특히 대역이나 CG 없이 피아노 연주 장면을 실감나게 선보인 배우 박정민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그는 피아노에 천재성을 보이는 진태 역에 충실하기 위해 6개월 동안 하루 5시간씩 손가락에 얼음 찜질까지 하며 연습했다고 합니다. 그런 피나는 연습이 있었기에 연주를 듣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았을 겁니다. 배빗과 픽, 시온, 진태 등은 '재능있는 천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4년 영국 BBC 다큐멘터리 <브레인 맨>에서는 '믿을 수 없는 두뇌를 가진 청년'이란 제목의 방송을 통해 서번트 증후군 중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가진 대니얼 태멋이란 26세의 천재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사회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자폐증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을 앓았고, 다섯살 때 심한 간질 발작을 일으킨 후 뇌에 변형이 생겨서 뇌기능 장애와 천재성을 가진 서버트 증후군이 되었습니다. 보통의 서번트 증후군은 언어 능력이 떨어져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 설명을 잘 못하지만 태멋은 언어 능력도 뛰어난 특별한 경우라 '경이로운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멋은 1에서 1만까지의 숫자 중에서 소수와 소수가 아닌 수를 정확하게 가를 수 있었고, 5시간 동안 22,514개의 원주율 소수점 이하 숫자들을 암송해서 유럽 신기록을 세웠으며,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10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다큐 제작자들은 그의 언어 능력을 시험하려고 아이슬란드로 데려가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어렵다고 알려진 아이슬란드어를 1주일 동안 배우게 한 후에 테스트를 했습니다. 그런데 토크쇼 진행자와 인터뷰를 능숙하게 할 정도로 말을 잘 해서 괴물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태멋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핀란드어에서 영감을 얻은 맨티(Manti)라는 언어를 발명해 문법과 어휘를 체계화 시키고 있습니다.
케임브리지대학의 자폐증 전문가 사이먼 배런-코헨 교수는 태멋이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비결로 두 가지를 꼽았습니다. 먼저 모든 감각이 뒤얽혀서 생기는 '공감각 장애'입니다. 태멋은 모든 숫자에 고유의 모양과 색깔, 특징, 감정이 담긴 어떤 '분위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숫자 9는 불길함이 느껴지는 짙은 청색이고, 숫자 37은 죽처럼 물컹거리는 회색이며, 숫자 89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처럼 흰색으로 표현합니다. 소수는 조약돌처럼 매끄럽고 둥글둥글하며, 정수는 깨진 돌처럼 뾰족하고 거친 느낌이 난다고 말합니다.
다음으로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면서 편집 증상을 보이는 '사회성 장애'입니다. 태멋은 어릴 때부터 공공장소를 피해 다녔고, 작은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합니다. 낙엽 모으는 것을 좋아했고, 칫솔질 소리를 무척 싫어했으며, 모든 것을 숫자로 계산하기도 했고, 아이돌 그룹에 대한 정보를 백과사전처럼 자세히 알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아침에 죽을 먹을 때 전자저울에 달아서 정확하게 45그램만 먹었다고 합니다. 태멋은 사회성을 키우기 위해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방법을 연습하고, 언제 말을 시작할지, 어떨 때 멈추어야 하는지 등을 알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억력 챔피언과 서번트 증후군은 무엇이 다를까요? 예를 들어 전화번호부의 이름과 연락처를 암기한다고 했을 때 기억력 챔피언은 후천적인 연습과 훈련을 통해 습득한 기억법을 의식적으로 활용합니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이미지로 바꾸고, 기억하기 쉽도록 이를 조합해서 자신만의 기억의 궁전에 집어넣는 방식입니다. 반면에 서번트 증후군은 선천적으로 타고났거나 후천적인 사고나 질병으로 생긴 특별한 능력을 무의식적으로 활용합니다. 그냥 이름과 전화번호를 스캔하듯이 눈으로 쭉 훑는 방식입니다. 어떤 이유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뇌과학자들은 서번트 증후군마다 증상이 다르기때문에 정확한 이론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신경해부학적 측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상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좌뇌의 손상입니다. 즉, 서번트 증후군은 좌뇌에 문제가 있거나 좌뇌와 우뇌의 연결이 끊어져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서번트 증후군들은 시각과 공간 지각 등 우뇌의 기능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만 언어와 논리같은 좌뇌의 기능은 정상인보다 떨어집니다. 실제로 우연한 사고로 좌뇌를 다친 사람이 갑자기 서번트 증후군같은 능력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1979년에 올랜도 서럴이라는 10살 소년이 왼쪽 머리에 야구공을 맞은 뒤 달력의 날짜를 계산하고, 지난 10년 동안의 모든 날씨를 기억하는 놀라운 능력이 생겼습니다. 캘리포니아대학 샌프란시스코 캠퍼스의 신경학자 브루스 밀러는 치매 노인들을 연구하고 있는데, 좌뇌가 손상된 치매 노인들이 놀라운 음악적,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합니다. 즉, 좌뇌의 인지 능력이 사라지면서 우뇌의 기능이 초과 발휘되어 서번트 증후군이 된 것입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고나 질병으로 서번트 증후군이 될 수 있다면, 우리 안에 그런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 겁니다. 다만 좌뇌의 억압에 눌려서 우뇌의 능력이 발휘되고 있지 않을 뿐입니다. 우뇌의 잠재력을 살리려면 좌뇌를 비활성화 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의자를 그린다고 했을 때 우뇌는 의자 전체를 직관적이고 고차원적으로 인지하지만 좌뇌는 의자를 추상적인 점과 선의 집합으로 바라보면서 체계적이고 저차원적으로 인지합니다. 즉, 보통 사람은 의자를 그릴 때 좌뇌의 영향을 받아 도화지에 구상을 하고, 스케치를 한 후 채색을 하지만 서번트 증후군은 우뇌의 영향을 받아 의자를 통째로 그려내는 겁니다. 보통 사람은 스케치와 채색의 순서를 바꾸거나 좌우, 상하를 바꾸어 그리기가 어렵지만 서번트 증후군은 순서와 위치를 바꾸더라도 문제 없이 잘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전체를 바라보는 연습을 하면 우뇌의 잠재력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