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장애(학습부진)를 극복한 스토리 #3
백곡 김득신은 명문 사대부가의 자손으로서 아버지가 정3품 부제학을 지냈다. 태몽에 나온 ‘노자’의 정령을 받고 태어났으나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다. 10살에 겨우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 주위에서 우둔한 아들을 포기하라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는 저 아이가 저리 미욱하면서 공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대견스럽다네."라고 말하면서 개의치 않았다. 나이 스물에 겨우 스스로 작문을 할 수 있게 되자 아버지는 "더 노력해라. 공부란 꼭 과거를 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란다."라고 격려해 주었다.
여러모로 부족함을 느낀 김득신은 다른 친구들이 책을 한 번 읽을 때 자신은 만 번을 읽겠다고 결심하고는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치열하게 노력했다. 그의 서재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서, 사람들은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고 불렀다. 김득신은 글을 읽을 때 1만 번이 넘지 않으면 멈추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어느 날 김득신은 하인과 길을 가다가 담밖에서 어떤 선비가 글을 읽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는 "그 글이 아주 익숙한데, 무슨 글인지 생각이 안 나는구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인은 "나으리, 정말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이 글귀는 나으리가 평생 읽으신 것이어서 쇤네도 알겠습니다요."라고 말했다. 그 글은 바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백이전(伯夷傳)’으로써 그가 무려 11만 3천 번을 읽은 글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정자에 둘러 앉아 시를 주고 받기도 했다. 김득신이 "내가 오늘 시를 지으면서 훌륭한 두 구절을 얻었다네."라고 말하자, 한 친구가 그게 뭐냐고 물었다. 김득신은 "삼산(三山)은 푸른 하늘 밖에 반쯤 떨어지고, 이수(二水)는 백로주(白鷺洲)에서 둘로 나뉘었네."라고 읊으면서 멋지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 시가 이백의 '봉황(鳳凰)'이라고 알려줬다.
수 만 번 외워도 잊어버리고 착각했던 그는 특별한 기록을 한다. 만 번 이상 읽은 책들만 베껴 쓴 독수기(讀數記)가 바로 그것이다. 매일 읽은 글의 제목과 횟수를 꼼꼼히 기록한 것이라서 오늘날의 '독서일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거기에는 36개의 고서에 대한 섬세한 평이 담겨있다. 그는 "<백이전>과 <노자전>을 읽은 것은 글이 드넓고 변화가 많아서였고, <의금장>과 <중용서>를 읽은 것은 이치가 분명하기 때문이며, <백리해장>을 읽은 것은 말은 간략한데 뜻이 깊어서였다. 이러니 여러 편의 각기 다른 문체 읽기를 어떻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라고 썼다.
김득신은 이런 노력 끝에 5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조선시대 오언절구와 칠언절구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잠기고, 가을산엔 소낙비가 들이친다. 저무는 강에 풍랑이니, 어부가 급히 뱃머리 돌리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그의 절구시 ‘용호(龍湖)'를 보고 조선의 17대 왕 효종은 “당시(唐詩) 속에 넣어도 부끄럽지 않다”고 칭찬했다. 서계 박세당은 "그는 옛글과 남의 글을 다독했음에도 그것을 인용하지 않고 자기만의 시어로 독창적인 시 세계를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았던 김득신은 스스로 지은 묘비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재주가 남만 못 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렸을 따름이다.”
어릴 때 바보 같다는 놀림을 받았던 백곡 김득신은 엄청난 독서와 필사(베껴쓰기)를 통해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도 늘 책에서 배운 대로 말하고 행동했으며,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묵묵히 책을 벗삼아 살았던 그는 치열한 노력의 가치를 보여준 참된 지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