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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린 Apr 10. 2018

비뚤어진 세상

김영하 -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현실은 우리의 삶을 잠식한다. 발버둥이 줄어들수록 우리는 그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일상으로 치환된 회피를 우리는 마주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오래 피할 뿐이다. 새로울 것 없는 딱 그만큼의 하루가 늘어진다. 옆 사람의 그늘을 바라보며 우리는 스스로를 짓누른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짧은 위안은 긴 시간 진흙 구덩이 아래로 우리를 끌어내린다. 너도 나도 더 깊게.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어. 깊어진 구덩이는 무감각을 낳는다. 지나치는 순간들이 쌓여간다. 그렇게 우리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나는 15층에서 1층을 향해 중국집 배달원처럼 달려 내려갔다. 5층을 지나가면서 보니 엘리베이터는 문이 열린 채로 6층과 5층 사이에 걸쳐 있었고 엘리베이터 아래로 사람의 다리 두 개가 대롱거리고 있었다. 한쪽 발은 신발이 벗겨져 있었다. 죽었을까 살았을까. 그때 내 앞으로 위층에 사는 사람들이 바삐 나를 밀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말쑥한 신사복을 차려입은 그들은 출근 중이었다.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끼여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무심히 지나치다니. 하지만 나 역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 정각. 이크. 나는 슬쩍 아래층 쪽을 내려다보면서 갈등했다. 할 수 없군. 나는 신발이 벗겨진 발을 살짝 당겨보았다(발은 내 얼굴 높이에 있었다). 여보세요. 발가락이 꿈틀거렸다. 말이라고 할 수 없는 신음도 흘러나왔다.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를 구해낼 힘도 시간도 없었다. 이거 봐요. 어쩌다 엘리베이터에 끼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출근하면서 119에 신고해줄게요. 아니면 아래층 경비에게 말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中


  소설 세상은 '엘리베이터에 남자'를 발견하고도 지나치는 일상이다. 믿기지 않는 상황을 마주하면서도 나포함한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출근'이다.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비판 어린 시선을 보내는 나 역시 '출근'하기 위해 계단을 서둘러 내려간다. 나에게 하나 남은 양심은 상황을 신고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경비는 없다. 핸드폰을 사지 않았던 '나'는 그를 구하기 위해 전화를 걸고자 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핸드폰을 빌려달라 부탁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그들이 나에게 알려준 것은 공중전화가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가는 동안 버스를 놓칠지도 모른다며 고개를 젓는다.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의 고통을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의 조소이다.


  지갑조차 놓고 온 나는 버스를 탈 돈이 없어 발이 묶인다. 우연처럼 트럭이 버스와 충돌한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나는 경찰에게도 구조대원에게도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구해달라 말하지만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경찰에게서 접수된 신고가 없다는 사실을 전해 들을 뿐이다. '나'에게 펼쳐진 기이한 하루는 계속해서 불행과 마주한다. 간신히 올라탄 버스에서 치한으로 오해받는다. '출근'하기 위해 겨우 달려 도착한 회사에서도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만다.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생각하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여직원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갇혀버린다. 나를 밟고 나가 도와줄 사람을 찾겠다던 여직원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다. 20분이 지난 뒤에야 나는 구두를 잃은 채 구출된다. 나는 그토록 '출근'해서 해야 할 업무에 돌입한다. 과장은 나의 행색과 지각의 이유를 묻지만 이내 '보고'를 하라 말한다.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소설은 '나'의 유달리 불행했던 하루를 비춘다. 집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나'는 신고를 하고 경비원에게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에 대해 묻는다. 하지만 작가는 독자에게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답을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독자는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생각하는 '나'에게 시선이 머문다. '나'가 겪은 하루의 잔상 속에서 우리는 연속된 불행을 마주한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오해 속에 '나'가 겪었던 불행의 연속. '나'의 하루는 길게 늘어진 날 중에서도 유난히 가혹한 하루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을 보고 있는 당신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당신은 '나'와 같은 하루를 겪어보지 않았는가.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나'에게는 '출근'이라는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회사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나'는 개인이 지워진 존재다. '나'가 한 사람의 개인으로 생각하는 때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를 도울 방법을 생각하는 순간일 것이다. 그렇기에 소설은 1인칭 시점인 '나'를 따라가고 있지만 독자는 마치 3인칭의 소설을 따라가는 느낌이 든다. '출근'을 위해 '나'는 트럭에 부딪치는 사건 현장에 있어도 치한으로 오해를 받아도 엘리베이터에 갇혀도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어떤 사건과 부딪쳐도 '나'의 반응은 일정하다. 분노를 느끼는 찰나도 출근을 떠올리는 것으로 금세 가라앉는다. 누가 보아도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어도 시스템 속에서 '회사원'은 필요한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동료라 불리는 사람들 역시 '나'를 개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나'에게 이유를 묻는 시간보다도 당장의 일을 빨리 처리하는 것이 시스템 속 그들의 '역할'이다. 시스템 속에서 '나'는 그저 버둥거리는 사람이다. 철저히 '타인'이다.


  시스템은 '나'가둬버렸다. 엘리베이터 사이에 것처럼 '나'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버둥거린다. 사실 엘리베이터에 남자는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일지도 모른다. '나'잠식한 현실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지나치는 것들. 우리가 함께 목격했지만 그래서 가벼워지는 것들. 같아지기 위해 자신을 지워내는 시간들. 당신이 지나친 '엘리베이터'에는 누가 버둥거리고 있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구덩이 아래로 가라앉을 것인가.


아, 그래서 지금도 나는 궁금하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 김영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문학동네

- 단편선 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엘리베이터를 발견한 당신에게.


* 민음사 우수 리뷰어 선정작


+ 단편소설 브런치

제임스 조이스, 애러비

https://brunch.co.kr/@kamori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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