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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린 Apr 27. 2018

예정된 뱃머리

허먼 멜빌 -『모비딕』

모비딕. 누군가의 삶을 뒤바꾼 거대한 향유고래가 있다. 향유고래는 곧 전설이 되었다. 선원들이 수없이 반복했던 ‘고래잡이’의 방법이 그 고래에게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예측은 빗나갔고 그 대가로 누군가는 팔을, 누군가는 다리를 잃었다. 심지어 하필 그 누군가가 배를 이끄는 선장이어서 모비딕의 그림자는 더 짙고 커졌다. 팔을 잃은 선장은 다른 팔도 잃고 싶지 않다며 뱃머리를 돌렸지만 다리를 잃은 선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수를 하고자 한다. 그는 광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광기는 곧 서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독자는 에이헤브 선장이 마주할 예정된 뱃머리를 기다린다. 그토록 찾던 모비딕과의 대결을 고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독자가 예상하는 그 끝을 뒤로 유예하며 끊임없이 멈춘다. 그 자리에 작가가 조사한 현실적인 정보들이 자리 잡는다. 전반부에는 성경 속 이야기를 동원해 미래를 예언한다. 후반부에는 끝을 유예하며 고래에 관한 정보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독자는 현실에서의 모비딕과 에이헤브가 마주할 모비딕의 간극을 느낀다. 이러한 다층적인 결들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이야기는 고전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모비딕을 떠올릴 때 사람들은 모비딕과 선장의 대립을 떠올린다. 모비딕에게 팔을 잃은 선장의 복수극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선장에게 있어 모비딕은 단순한 복수의 대상이 아니다. 모비딕‘욕망의 집결체’인 것이다. 선장은 모비딕에게 맹목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다리를 삼켜버린 그 ‘괴물’을 자신의 손으로 무너트리고자 했다. 판단을 내려야 할 그의 이성은 광기에 사로잡혀 짓눌렸다. 덕분에 그는 소설 속에서 오로지 모비딕을 잡기 위해 그 광기를 선원들에게 내뿜는다. 광기를 몰아쳐 그들을 전염시키는 것이다. 이미 선원들은 그에게 있어 모비딕을 잡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스타벅의 끊임없는 권유에도 그는 예정된 운명을 향해 광기를 뿜어내는 것이다. 자신이 모비딕을 죽이는 일을 예언하겠다고 밝히며 그는 자신이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곧 신을 뛰어넘는 일이라 자평했다. 그는 광기로 자만했고 그 확신은 예정된 비극으로 이끈 것이다.

마지막까지 올곧이 그를 설득하고자 했던 스타벅의 노력이 통하지 않은 것도 어쩌면 그의 오만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욕망은 신과 인간의 대립, 앞서 복선으로 흘러나왔던 요나의 이야기와 닿아 있다. 그는 절대적 존재를 꺾는 욕망을 품었으나 결국 그 존재에 의해 좌절된다. 어쩌면 모비딕은 그에게 욕망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신이 아닐까.


  종교적 암시는 소설 곳곳에서 이루어진다. 주인공의 이름이 이스마엘로 시작되는 부분부터 앞서 말한 요나의 일화를 한 목사가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장면. 나의 이야기는 후반부에 이르러 ‘이스마엘’의 생각이 개입한 영역으로 다시 등장한다. 진실하고 거짓 없는 참회.  과연 진실하고 거짓 없는 참회가 가능한가. 결론에 이르러 선장이 마주한 ‘현실’은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가 수없이 생각했던 결말은 상상으로 끝을 맺었다. 요나가 신이 내린 ‘현실’과 마주하듯 말이다. 하지만 그 ‘현실’이 과연 거짓 없는 참회를 이끌 수 있을까. 절대적인 존재가 자신의 위력을 보여주며 인간을 압도해버리는 그 순간이 정말 참회로 귀결될 수 있을까.


이야기에서 언급되었던 ‘우상숭배’에 관한 잔상들이 스쳤다. 제로보암호. 이름 속에 숨겨진 우상숭배에 관한 이야기. 그 선박에서는 그것을 증명하듯 ‘우상’이 되고자 하는 존재가 그려진다. 가브리엘은 선장의 권위를 뛰어넘어 사람들을 조종한다. 전염병이 도는 일을 신의 계시로, 고래를 잡다가 일어난 누군가의 죽음 역시 믿음이라는 이름의 두려움으로 치환한다. 공포가 만들어낸 두려움은 맹목적이다. 제로보암호에서 역시 신의 이름을 빌린 인간의 ‘압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압도된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스마엘은 의미심장한 존재다. 그의 이름이 뜻하는 ‘추방자’의 의미는 성경 속 인물처럼 압도의 현실에서 밀려난 것이 아닐까. 하필 그를 구한 것이 이교도이자 친구였던 퀴퀘그의 관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퀴퀘그가 건넨 ‘나무 조각’에 흔들림이 포착된 순간 그는 이미 추방이 예정된 것은 아닐까.


  믿음이란 무엇인가. 공포를 통해 조성된 거짓된 믿음은 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물음이 또 다른 생각을 던진다. 살아남은 이스마엘에게 남겨진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이 정말 구원으로 이어진 지름길일까? 끝끝내 신이 고래를 보내 구원한 요나처럼?


  이 소설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형식을 떠나 당대의 현재를 너무나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항해에 관련된 소설 중에서 모비딕의 디테일을 따라잡는 소설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선원들을 죽음으로 내몬 광기 어린 선장의 모습이 파도 속에서 일렁인다. 그는 비난해야 하는 존재일까. 운명보다도 욕망에 충실했던 그의 존재감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소설 속의 모비딕 보다도 그가 나를 압도했기 때문인 것 같다.


- 허먼 멜빌, 모비딕, 강수정 옮김, 열린책들

- 모비딕을 쫓고 있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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