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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린 Jan 08. 2019

고독의 역사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백 년의 고독』


  백년이 흘렀다. 까마득한 세월이다. 흘러간 시간만큼 과거의 그때와 지금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변해버렸다. 세월 속에서 우리는 세찬 물줄기에 휩쓸린다.


  소설을 읽다 보면 독자는 어느 순간 그 세월을 가늠한다. 한국의 근대사와 닮은 이야기 속에서 현재를 바라본다. 휩쓸린 우리는 현재의 오늘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과거의 현실과 지금의 현실 속의 간극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작가의 단계적 장치와 권력을 지닌 자들에 의해 사라졌던 역사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지난 백년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역사 혹은 앞으로의 역사가 될지도 모르는 세월. 작가는 하필 백년이라는 단어 옆에 고독을 붙인 것일까.      

  




역사적 서사(마콘도를 중심으로) 



 근친상간의 저주로 부엔디아 가문에 돼지꼬리의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그들은 저주나 다름없는 예언을 피해 마을을 떠나 '마콘도'에 정착한다.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척박한 땅에 마을을 세우고 정착하며 조금씩 번창해나간다. 이들은 집시 '멜키아데스'를 만나 정착을 너머 문명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마을은 세월을 따라 성장을 이룬다. 정착했던 부엔디아 가문에도 아들의 아들이 태어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모여든다. 거대해진 마을에 조금씩 정부의 간섭이 시작된다. 평화로웠던 마을은 곧 정부를 지지하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로 나뉘어 다투게 된다.


  반정부파였던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전쟁을 이끌며 수없는 암살 시도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그는 이념을 위해 전쟁을 지속한다. 늘어지는 전쟁 속에서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왜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 가'도 잊어간다. 많은 것들이 망가지고 곁에 있는 이들이 바뀌어갔지만 그는 그대로였다. 아니, 그대로라고 여겼을 것이다. 전쟁 속에서 많은 것들이 변해버렸고 그 역시 변해버렸다. '전쟁'을 위한 '전쟁'.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휴전을 위해 또다시 전쟁을 치르는 현실을 마주한다. 


  평화를 찾았다고 여겼던 섬에는 또 다른 문명의 발전이 이어진다. 기차가 들어오고 '바나나 사업'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섬에는 '노동자 계급'이 생겨난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착취와 고통이 반복된다. 전쟁에서 벗어난 이들은 또다시 현실을 마주한다. 파업을 하여 정부에 대항해 보지만 '계엄령'이 발동되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정부는 민간인 사상자가 거의 없다는 말을 반복하며
사건을 역사 속으로 묻어버린다.

이들은 더 이상 마콘도에서 정착하며 서로를 돕던 모습을 잃는다. 점차 폐허가 되어가는 마을 속에서 그들은 '복권'을 팔며 생계를 이어간다. 다시금 '바나나 사업'에 도전해도 전과 같은 번영을 누리지 못한다. 부엔디아 가문의 입지는 조금씩 마을 밖으로 밀려난다.  


  ‘마꼰도에는 부엔디아 가문의 흔적은 전혀 남지 않은, 유리로 지은 거대 도시가 될 것이다’라는 예언은 결론에 이르러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다. 


근친상간의 저주로 돼지꼬리의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현실을 피해 정착한
 ‘마꼰도’는 비로소 돼지꼬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을 때 유리처럼 조각나 사라진다.



  '마꼰도'는 가상의 세계이지만 작가는 역사적 사건을 플롯에 담았다. 작품이 쓰일 당시에는 사건이 조직적으로 은폐되어 생존자의 '기억'으로 남겨진 상태였다. 정부 차원에서 비극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또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되면서 생존자의 '기억'은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허구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을 적립하는 일에 기반이 되었다는 일은 참 아이러니하다. 국가의 이해관계에 의해 사실이 조작되고 왜곡되며 때로는 이용당하는 것을 우리는 '한국의 역사'를 통해서도 지켜본 경험이 있다. 그러한 경험을 거친 우리가 바라보는 '마꼰도'는 허구이지만 지나치게 현실적인 역사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세월을 통해.




마술적 경계


  이야기는 적극적으로 신화와 결합한다. 부엔디아 가문의 신화인 ‘근친을 한 경우 돼지꼬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라는 부분에 독자는 주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부엔디아와 우르술라는 그들을 약 올리는 쁘루덴시오 아길라르를 죽이게 되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유령의 존재가 등장한다. 이들은 그의 죽음으로 살던 마을을 버리고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게 된다. 그리고 정착한 곳이 ‘마꼰도’이다. 


 마꼰도에 부엔디아 가문의 흔적은 전혀 남지 않은,
유리로 지은 거대 도시가 될 것이다.


  처음으로 제시된 이 신화는 이야기의 마무리까지 연결되어 사실상 서사의 큰 구축을 담당하고 있다. 예언은 이야기의 마술적 분위기를 부여한다. 독자는 제시되는 예언이 서사 속에서 어떻게 구축될 것인가를 떠올리게 된다. 


  현실적인 전개 속에 작가는 은밀히 마술적 요소를 섞는다. 이러한 방식은 잘못 구사하면 오히려 사실주의적인 요소를 반감시키고 독자의 몰입을 깨는 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마술적 요소를 통해 독자의 몰입과 사실주의적 사건에 새로운 면모를 덧붙인다. 


  도입부에도 드러나는 연금술은 인물의 특징을 설명하는 요소로 활용되면서도 독특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아우렐리아 대령이 전쟁의 덧없음을 깨닫고 금화를 녹여 황금물고기를 만들고 다시 금화를 받는 장면을 통해 그의 고독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활용한다. 후에 이어지는 양피지 속 예언과 이어져 소설의 결론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작가가 또 다른 방면으로 활용한 것은 각 인물의 죽음의 장면이다. 앞서 밝혔던 유령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나 자신의 과거에 괴로워하며 처녀로 죽어가는 아마란따의 경우는 일종의 사신을 만난다. 레베까에게 고통을 주었던 자신을 탓하며 레베까의 ‘수의’를 만들던 그녀는 결국 자신이 먼저 죽음을 맞이할 것을 깨달으며 자신의 ‘수의’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장치는 사실적인 죽음을 묘사하는 것보다 아마란따의 죽음의 ‘아이러니’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만들었다. 돼지꼬리를 가진 아이를 낳는 인물들이 피가 말라죽는 모습이었다는 묘사 역시 ‘신화적 예언’에 오히려 현실성과 비극성을 부여하는 장면으로 극대화된 것이다. 이외에도 미녀 레메디오스가 갑자기 승천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나 우르술라가 죽음을 맞이할 때 마치 씨앗처럼 몸이 오그라들었다는 묘사는 ‘죽음’에 대한 각 인물의 상황에 맞춰 장면을 증폭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마무리 


   작가는 왜 백년이라는 세월 뒤에 고독을 붙인 것인가.


  우리는 그가 만들어낸 마술적인 '현실' 속에서 인물들의 고독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은 때때로 사랑으로,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영웅으로 받들어지던 존재에서 은둔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추락한다. 부엔디아 가문에 이어져온 이름은 그 자손에게도 비슷한 운명을 부여한다. 고독한 죽음은 반복되었고 그 사이 세월은 그저 흘렀다.


  가문의 세월은 인간의 역사였다. 그들은 정착했고 발전해갔다. 발전 끝에 놓인 세계에 가문의 흔적은 지워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백년의 고독을 너머.

 

다시, 세월을 맞이할 것이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 년의 고독, 조구호 옮김, 민음사

- 백 년을 지켜볼 당신에게.


+현대 장편소설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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