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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린 Jan 13. 2019

2부_풍자 위에 비친 현실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3부와 4부 중심으로)


3라퓨타, 발니바비, 럭나그, 글럽더브드립, 일본 여행기


천공의 섬 라퓨타 프랑스 포스터


  이제 작가는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를 소개한다. 공중에 떠 있는 섬, 라퓨타. 미야자기 하야오의 '천공의 섬 라퓨타'로 친숙하게 느끼는 바로 그 소재다.


  작가는 섬이 '공중'에 떠있는 것으로 인해 생긴 '사람들'의 현실을 비춘다. 섬이 언제 떨어질까 두려워 불안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 섬을 살아가는 남성과 여성은 다른 결의 '현실'을 마주한다.


  섬의 남자들은 언제나 심연의 세계에 잠겨있다. 그들은 불안한 나머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깊은 생각을 하는 동안 그들은 현실을 마주하지 못한다. 그들의 옆에는 장애물을 피할 수 있게 돕는 '때리기꾼'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때려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대로 사고를 직면하게 될 테니 말이다. 심지어 다른 이를 만날 때 역시 대화를 위해 때리기꾼을 동반한다. 때리기꾼이 타이밍에 맞춰 그들을 건드려주지 않으면 섬의 남자들은 '소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멈춰 있는 삶'을 살아간다.


  섬의 여자들은 '라퓨타'를 탈출하곤 한다. 그들은 라퓨타 아래로 도착한 배에 올라타며 섬을 떠나간다. 추락할지 모르는 '섬'보다 미지의 새로운 '세계'를 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섬을 살아가는 권력가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기술과 혁신의 이단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들은 주민들의 세금으로 터무니없는 것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다른 교수는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와 계획을 가진 사람을 발견해내는 방법이 기재된 커다란 문서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중략. 그가 실험 삼아서, 변기에 앉아 있을 대, 왕을 살해하는 방법으로 무엇이 가장 좋을까를 심각하게 고려해보았는데, 그때 그의 대변이 녹색을 띠었으며, 단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나 수도를 불태워버리는 것만을 생각할 때는 변의 색깔이 전혀 달라졌다는 것이다.  
-3부 라퓨타, 발니바비, 럭나그, 글럽더브드립, 일본 여행기 중     


  귀족들은 국민들의 세금으로 각자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대변 색깔로 반역의 무리를 살핀다는 식의 어이없는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걸리버가 향한 곳은 글럽더브드립, '마법의 섬'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마법을 통해 '과거의 인물'을 소환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막연히 역사 속 인물을 만나게 되면 그들을 향한 존경심에 불타게 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걸리버는 그들에게 환멸을 느낀다. 자신이 알고 있던 역사와 다른 '현실'의 역사를 듣게 된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하는 사람이 사실은 행동하지 않는 것을 택했거나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이 어떠한 비행을 저질렀는 가를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작가는 독자에게 역사에 대해 말한다. '승자의 기록'. 권력을 지닌 자들의 의도에 의해 기록된 역사는 과연 진정한 진실일 수 있는가. 그들의 지배 아래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현실은 왜 '역사'로 살아남지 못했는가. 작가는 이제 환상적 세계를 통해 독자에게 새로운 사유의 항해를 이끌기 시작한다.


  럭나그는 영생인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 럭나그에서는 때때로 영생인이 태어난다. 걸리버는 영생하는 이들이 행복할 것이라 여기지만 그들을 직접 마주한 뒤 생각이 뒤바뀐다. 그들은 말 그대로 영생만 하는 존재였다.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체로 30세 이후 절망하기 시작하여 80세에 이르면 법적으로 죽은 사람이 된다. 가장 아이러니하게 느꼈던 지점은 영생인들 끼리 대화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80년 이상을 살아간 그들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 언어를 익히지 못해 그들끼리도 소통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부분으로 인해 영생인의 존재를 인식한 럭나그 사람들은 영생인이 불행한 존재라고 느끼며 영생에 대해 ‘동경’을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원히 사는 것. 작가는 이제 독자에게 죽음의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것은 절대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생은 뱀파이어처럼 늙지 않는 육체와 여전히 누군가와는 소통이 가능한 현실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영생인은 점차 늙어가는 육체와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인 것이다. 그것은 과연 행복한 것일까.


  작가는 3부에 이르러 다양한 환상의 공간을 소개하고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풍자 속에 감춘다. 당연히 여겼던 개념에 대한 의문. 둥글게 느꼈던 작가의 질문은 화살처럼 독자의 뇌리에 박혀버렸다.




4말의 나라 여행기


  걸리버는 이제 '사람'이 아닌 존재와 대면한다. '말'의 형상을 가진 그들은 '후이늠', 그곳에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닌 야성적인 존재 그 자체인 '야후'였다. 소인국에서도 거인국에서도 왕족을 향해 고개를 숙이던 걸리버는 그 나라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인 '후이늠'에게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그 나라에서 인간의 모습인 야후보다 우위에 있는 이성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야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철저히 이성적인 존재, '후이늠'은 인간으로 살아온 '천재 야후'인 걸리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성적인 그들에게 거짓말, 권력, 정부, 전쟁, 법률 등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후이늠'에게 걸리버의 세계는 터무니없는 곳이었다. 그는 걸리버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이렇게 평가한다.


  걸리버의 세상 속 야후는 이성의 타락에 도달한 사람들이라고.   


  인간이 저지르는 전쟁, 약자를 돕지 못하는 제도는 이성이 있는 존재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작가는 후이늠을 앞세워 독자에게 인간의 모순을 전한다. 걸리버는 후이늠인 그의 주인이 그러한 모순을 지어낼수록 점차 자신을 그들에게 맞추어간다.



   걸리버를 통해 문명화된 야후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이늠은 야후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걸리버는 후이늠과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두려움을 느낀다. 야생적인 야후와 자신은 엄연히 다른 존재라 믿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걸리버는 목욕하려던 자신에게 암컷 야후가 흥분하여 달려드는 순간 깨달은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그들은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 역시 그들과 그저 한끝의 경계에 서있는 '야후'인걸까. 그의 두려움은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먹을 것을 양보하지 않고 반짝이는 것을 두고 다투는 그들. 인간의 야생적 면모를 지닌 존재들이다.  야후의 이야기를 듣고 두려움을 느끼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말의 나라에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그는 더 이상 후이늠을 말로 보지 않고 그들을 떠받든다. 그들의 언어를 따라 하는 일에 몰두하고 걸음걸이조차 흉내 낸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될 때 완전해지는 것인가. 걸리버는 정말 그들의 이성적인 모습에 굴복한 것인가. 사실 그는 그들의 이성적인 모습을 동경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절대적인 위치에 고개를 숙인 것은 아닌가. 작가는 걸리버의 모습을 통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걸리버는 점차 ‘야후’를 하찮게 여기며 ‘후이늠’이 가장 고귀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가 말했던 이야기는 야후를 통제하는 수단의 방법으로 활용된다. 마치 ‘후이늠’이 된 것만 같던 그는 후이늠과 동등한 취급을 받는 야후라는 이유로 그 세계에서 쫓겨난다.



  이전의 나라에서와는 다르게 그는 자신의 의지보다도 나라 사람들에 의해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런데 더는 그의 눈에 말은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성적인 존재이자
그의 주인 ‘후이늠’인 것이다.


  아내는 이제 더는 동등한 인간이 아닌 야만적인 ‘야후’였다. 후이늠의 나라에 3년을 지낸 그에게 있어 인간은 가장 타락했으며 야만적인 존재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역시 ‘인간’ 임에도 말이다. 


결국 작가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걸리버조차 풍자하며
이렇게 이야기의 끝을 맺는 것이다.




마무리


  걸리버는 자신의 여행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걸리버는 자신이 여행기를 책으로 출판한 것은 출판업자인 친구의 제안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책을 통해 후이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낸다. 



  작가는 '작가의 말'조차 걸리버의 목소리로 전하는 것이다. 그가 여전히 후이늠의 나라를 동경하고 인간을 '야후'로 여긴 채 살아간다는 것. 걸리버는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왔으면서도 가족에게 거리를 두고 '말'을 '후이넘'으로 숭배한다. 그는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후이늠'이라는 자신의 '이상적 나라'에 '자신'을 두고 온 것이다. 



  1부에서 4부까지 이어지는 여행기를 통해 작가는 '풍자'라는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야기는 각각 그 시대를 반영하는 상징과 맥락을 가지고는 있으나 그 맥락을 알지 않아도 여전히 이야기는 '현재'에도 유효한 논재들이다.



  1부에서 몸집이 거대해진 걸리버를 두고 나타난 소인국의 '권력자'들, 2부에서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 본 인간의 세세한 '본성', 3부에 이르러서는 환상적 요소를 이용해 인간의 문명과, 죽음 등의 논재로 들어섰고 4부에 이르러서는 '후이넘'이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의 역사와 '절대적 이성'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걸리버 여행기를 다시 읽으며 그런 생각이 스쳤다. 여러 매체를 통해 축소된 한 장의 '이미지'로 걸리버 여행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책장에서.


 우리는 다시 '걸리버 여행기'를 꺼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박용수 옮김, 문예출판사

- 당신이 걸리버 여행기를 다시 읽길 바라며




+ 고전 장편 소설 브런치

아모스 오즈, 나의 미카엘 https://brunch.co.kr/@kamorin/3

허먼 멜빌, 모비딕 https://brunch.co.kr/@kamori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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