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첫 집 구매의 여정
어렸을 때부터 교회 사택에서 살았던 나는 그 집이 우리 집인 줄 알았다. 하지만 부모님이 교회 임지를 옮겨가실 때마다 그 집은 더 이상 우리 집이 아닌 다른 목사님의 집이 돼버렸다. 그런 삶을 살아오면서 나는 목사는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지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이 청빈의 삶이요 그것이 구별된 삶이라 생각했다.
"사랑하는 자 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베드로전서 2장 11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린도후서 5장 1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요한복음 14장 2절)
목사는 선택된 자요, 구별된 자요 그렇기에 고생해야 하고 가난해야 하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바쳐야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고 주님으로만 만족해야 할 목사님들에게도 키워야 할 처자식이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은퇴를 곁에서 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목사는 하나의 타이틀일 뿐이지 절대로 특별하게 선택받고 바쳐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목사라는 타이틀이 나의 정체성인 줄 알았는데, 이민이라는 과정을 통해 목사가 직업의 한 종류로 분류됨을 보는 것을 시작으로 타이틀과 나 자신을 분리하는 과정을 겪었다. 한번 목사를 하면 죽을 때까지 목사로 살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배웠다. 나의 마음에 '목사는 집이 있으면 안 된다. 나는 하늘에 집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헛된 자위감으로 집을 살 수 없는 나의 능력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능력을 보완할 시도를 하기보다는 나는 복음의 희생자(?)라는 프레임으로 집이 있는 사람, 특별히 목사를 정죄하고 무시했었다.
돌아보니 하나님은 나에게 집을 주시기 위해 먼저 목사라는 직업과 나라는 자신과 그리고 목사로서 나를 부르신 부르심을 분리하는 작업을 하셨던 것 같다. 이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그래도 이 깨달음의 순간은 그동안 작은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던 나에게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