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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원인 Jan 31. 2017

감정노동자

민.원.상.담.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아내가 오랜만에 준비한 당면이 듬뿍 들어간 고추장찌개를 한 술 뜨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립니다. 

해맑은 목소리의 젊은 여성은 어린 자녀들을 위한 보장성 높은 화재보험을 소개합니다. 지난번 인터넷 쇼핑 때 이천 원 할인 조건으로 무슨 보험회사의 연락에 동의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약국에 갈 때마다 일만 원씩 입금을 해준다는 대목에서 잠깐 흔들렸지만, 이런 전화가 한두 번도 아니고 점잖게 거절하려 목소리를 가다듬습니다. 독심술을 부린 것도 아닐 텐데 그는 거절 의사를 눈치챘는지 목소리가 솔에서 라음으로 변합니다. 처음 통화를 시작했을 때부터 상대가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 잘 훈련된 텔레마케터입니다. 쫄깃하게 익었던 당면은 수경재배 식물처럼 찌개국물을 머금고 퉁퉁 불어 버립니다. 어디서 그 목소리를 끊고 들어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아내가 밥공기를 반쯤 비우자 속에서 조급증이 났는지 ‘안 합니다’ 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그러고는 뭐가 분한지 묵묵히 밥을 먹는 아내에게 우리나라 텔레마케터들은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너무 일방적이다, 이러니 노인들은 대책 없이 당하는 거다 열을 냅니다. 


학교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 제대로 약속 장소에 모여있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후문 앞 구멍가게를 기웃거리거나 복도를 서성거리고, 심지어 겨우 불러 모아 차에 태워도 실내화를 신고 왔다며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일이 태반입니다. 서로 앞줄에 앉겠다고 치고받거나 피구나 닭싸움에서 지고서 서러운 눈물을 쏟아냅니다. 여덟 시에 마지막부 운동이 끝나고 운행을 마치고 나면 아홉 시가 되어서야 저녁상을 받습니다. 아내가 저녁을 준비할 동안 아이들을 씻기고 식탁에 앉히려는데 부모와 함께 늦게까지 도장에 있다 이제 집에 돌아온 아이들은 본격적으로 놀 심산으로 더러운 양말로 침대에 올라가 왕왕거리며 놀이를 시작합니다. 극심한 허기인지 바닥난 체력 때문인지, 눈은 선한 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짐승의 눈이 되어 선반 위에 올려둔 매를 찾습니다. 그렇게 이성을 잃은 수컷에게 습격당한 두 딸은 흐느끼며 때늦은 저녁을 먹습니다. 


신문에서 감정노동에 관한 기사를 읽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직업군에서 물리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 감정노동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특히 백만에 가까운 텔레마케터들 대부분이 여성이며 고객들의 폭언에도 회사의 전화 녹취 때문에 늘 웃을 수밖에 없다는… 기사 말미에 각종 견과류와 신선한 채소를 권하기도 했지만, 삶은 양배추처럼 심을 잃은 자신의 감정을 회복할 방법을 나름 생각해 봅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가족들과 둥글게 앉아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서로 격려해주는 것. 큰 아이는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다툰 일을 이야기하고는, 그래도 자신의 일보다 먼저 엄마 아빠가 아프지 않기를 축복해 줍니다. 엄마 아빠는 자신들의 하루가 조금이라도 선한 일에 보탬이 되길 바랍니다. 상황을 모르는 네 살배기 막내는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식구들을 웃겨줍니다.


지난주, 핸드폰 해약 건으로 통신사 직원하고 통화할 일이 있었습니다. 전의에 공식 대리점이 없어 이메일로 해지 계약서를 받아 사인을 하고 다시 스캔을 받아 통신사로 보내야 한다는 말에 감정(?)이 좀 복잡해졌지만, 누군가의 귀한 딸이자,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일지도 모르는 그의 고단한 삶이 떠올라 ‘자세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회사에서 교육받은 대로 물 흐르듯이 이어지던 그의 목소리에 잠시 간극이 생기더니,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감사합니다’ 하고 응답합니다. 매뉴얼에 없는, 그의 진짜 목소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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