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rom islan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원인 Feb 01. 2017

세월

민.원.상.담.실












새벽녘, 간밤에 짜게 먹었는지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보니 취침등 아래 완연한 여자의 얼굴을 한 큰 딸이 옆에 누워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 중2의 민희는 이제 제 정수리를 굽어볼 만큼 자랐고, 제초 때를 놓친 한여름 잡초처럼 두 다리의 털도 무성합니다. 6학년이었던 윤진이는 수줍게 이성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볼 때마다 무턱대고 음료수를 사달라고 졸랐던 아홉 살 병훈이는 주변 사람들을 챙기며 배려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듯합니다. 그들은 탈모약 광고처럼 매일 자라고, 굵어지고, 풍성해집니다.


고등학생 무렵, 집이 군부대라 아버지와 관사에서 흠뻑 젖을 만큼 테니스를 치고서는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게 주말의 정해진 일과였습니다. 그을린 등을 밀어주시는 아버지는, 몸이 탄탄하구나 하시며 당신의 아들을 믿음직스러워했습니다. 저 역시 아무리 스매싱을 때려도 기똥차게 네트를 넘기는, 십 대가 범접할 수 없는 아버지의 관록이 부러웠습니다. 

타임슬립이라도 한 듯 이제 마흔을 넘긴 아들은 약국에서 피로회복제를 찾고, 아버지는 내일모레 칠순입니다. 칠순을 앞둔 아버지는 두 딸의 아비가 된 아들이 힘들까 아파트 오층까지 이십 킬로그램이 넘는 양파 꾸러미를 올려놓고 가셨고, 아들은 후들거리며 계단을 올랐을 아버지의 얇아진 종아리가 머릿속에 떠올라 전화기에 다시는 그러지 말라며 짜증을 냅니다. 


울적해집니다. 청춘과 달리 늙음에는 가속도가 붙는 듯합니다. 욕망과 미련이 묵은 때처럼 수없이 덧씌워진 탓일까요? 그저 이렇게 사라지는 건 아닌지 두려워집니다. 매일 가치 있는 삶을 살겠다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길바닥에 뭐라도 흘린 사람처럼 자신이 제대로 걸어가는지 이리저리 살피며 쭈볏대는 자신을 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옥수수 심은 자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