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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원인 Feb 04. 2017

여자애

민.원.상.담.실

영화 <우리들> 중에서


긴 생머리에 빨간 리본을 달고 동그랗게 눈 뜬 여자애를 보면 마음의 빗장이 쉽게 풀립니다. 가방에 꿍쳐둔 막대사탕이나 초콜릿이 없나 주섬주섬 뒤지기도 하지요.


이름이 뭐니?, 몇 살이야? 


먹고 사느라 뻣뻣해진 얼굴 근육을 좌우로 활짝 전개해 살갑게 말을 건네자 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상하게 생겼다. 


아랍 소녀의 손에 쥐어진 폭탄처럼 무방비 상태에서 펑하고 마음이 산산조각 납니다.


평소 여자들을 마주 대하면 행여나 그 여린 마음이 상할까 싶어 명절 과일 고르듯 단어를 살피고 한두 수 앞을 생각해서 행동하는 편입니다. 민감한 사춘기 소녀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작고 연약한 몸짓에 섬세한 사고를 가진, 나와 다른 이성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필터링 없이 말을 내뱉고 시선을 던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들이 완숙한 여성의 코스튬을 입었을 뿐, 아직 어린아이라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가끔 내 건강한 자아가 붕괴될 것 같아 최대한 억누르고 훈계라도 하면 돌아오는 건 엎드려 절 받기 식의 사과뿐. 어른인 채 하고 싶었던 거야란 냉소.

결국 본전도 못 찾고 관계도 무너진 채 너덜거리는 멘탈만 남습니다.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운 커다란 혼돈의 시기를 겪고 있는 여자애들은 마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바다와 같습니다. 어르고 달래고, 따끔하게 화도 내보지만 결국 인위적으로 재단하거나 조종할 수 없는 존재임을 심해에 빠져 이리저리 뒤채인 후에야 인정하게 됩니다. 


부끄럽지만 바다의 깊이를 재보겠다고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제 한 몸 던져버릴 용기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백사장으로 길게 밀려 들어와 스스로 잔잔한 포말을 내밀 때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수줍게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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