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에서 오미크론으로 옮겨가는 형세다. 근래 들어 또 종교시설에서 집단적으로 발생한다. 여기에 미접종자 기본권 침해 또한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법원은 백신 접종을 안한 청소년의 경우 학원과 독서실 출입을 못하게 한, 정부의 '방역패스'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생필품조차 사지 못한다는 미접종자의 청와대 청원란에는 수 십만 명이 동의를 하고 있다.
어제보다 더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이제 아예 우리 삶으로 깊숙이 들어와 연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코로나19’가 한 달 새 이렇게 권위의 존재가 된 데에는 ‘30만 신도를 가진 신천지’라는 이단 종교가 있다. 그런데 한 나라를 통째로 뒤집어 놓은 ‘신천지’는 신도수를 속이고 교주는 행방이 묘연하고 신도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려 애쓴다. 그야말로 비밀이 겹겹이 쌓인 사이비 이단종교이다. 어떻게 30만 명이 어리석게 이런 사이비 종교를 믿을까? 곳곳에 종교 행위라고 이해할 수 없는 학습장에 교주를 신봉하는 광기 어린 예배 행위는 또 무엇인가? 30만 명의 정신 상태를 의심케 하지 않을 수 없다.(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우기는 신천지 신도들과 이런 심각한 상황인데도 예배를 봐야 한다는 일부 개신교를 보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저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 30만 명은 이 대한민국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다. 옷차림도 헤어스타일도 나름대로 이 나라의 공교육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30만 명이 저렇게 되었을까?
‘1명의 교주: 30만의 신도’. 이 전율스런 대립 항이 성립하려면 신도는 교주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다. 처음부터 교주는 없었다. 누군가 교주에게 신도가 되었고 그는 교주의 권위를 인정해 주었다. 신도가 한 명 더 늘며 그도 또 교주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다. 더욱 신도가 늘고 교세(敎勢)가 확장되며 교주의 권위는 점점 커졌다. 신도들은 이제 교주의 무한 권위에 무한 복종할 수밖에 없다. ‘밀그램 실험’에서 ‘권위에 복종’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마치 학습 성과를 위해 전기 충격을 가하는 실험 대상처럼 잘못을 잘못이라 깨닫지 못한다.
대립 항을 달리해 본다.
‘코로나19: 5000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 ‘코로나19’는 교주처럼 절대적 권위의 폭력을 휘두른다. 5000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은 신도처럼 그 권위에 철저히 복종하는 형세이다. 마스크를 사려 긴 줄을 서고 방송은 붉은 자막으로 특집을 내보내고 정치권은 서로 이를 유리한 국면으로 만들려 하고 일부 사람들은 사재기를 해댄다. 벗들과 약속도 못하고 학교도 오지 말라하고 서로를 믿지 못한다. 심지어 가족 간에도 경계를 한다. ‘코로나19’ 앞에서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고 불안에 떨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받아들인다. 허나, 이 역시 밀그램 실험’에서 ‘권위에 복종’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밀그램 실험': 예일 대학의 교수 밀그램이 인간의 폭력성과 타율성의 연관성을 살펴보기 위해 한 실험을 하였다. 밀그램은 전문 배우 두 사람을 연구소로 초빙하여 한 사람은 교사 역할(권위적 인물)을, 또 한 사람은 학생 역할을 하도록 주문했다. 두 배우는 체벌을 통한 학습 성과의 개선 여부를 실험하고 있는 교수와 학생처럼 행동했다.
실험 대상자들은 거리에서 임의로 선택되었고, 그들은 모두 전문 배우가 연기하는 교수와 학생을 진짜로 여겼다.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 선택된 남녀 실험 대상자들은 교수가 학생의 학습 성과를 개선하기 위해 지시하는 체벌을 실험 대상자들에게 직접 집행케 했다. 체벌은 전기 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실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일상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던 평범한 사람들(실험 대상자들) 조차 적당한 권위(교수)에 굴복했고, 자신의 행동이 좋은 결과(학습 성과)를 가져온다고 여기며 타인을 잔인하게 고문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1963년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아렌트는 주장했다.
자,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1명의 교주’와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에서 없어야 될 악이다. 또 이러한 악은 셀 수 없이 많으며 우리 사회 도처에서 ‘권위에 복종’을 요구한다. 정부의 '방역패스' 정책 또한 권위에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고전을 전공하는 내가 고전(古典)에서 이에 대한 해법을 찾는다면 그것은 ‘나’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고전에서는 ‘나’를 찾으라 한다. 단 하루뿐인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다. 내가 내 삶을 살아간다면 ‘1명의 교주’와 ‘코로나19’, '방역패스'라는 권위의 폭력에결코 굴복치 않는다.
그러나 분명 알아야될 전제조건이 있다. 반드시 '내 행동에는 응분의 책임이 따른다'는 매우분명고도 명확한 사실이다. '권위에 복종'할 것인지 아닌지는 내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결과를 책임지면 된다.